1 <탕평책, 영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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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9. 09:18 한국사/1 전근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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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탕평책의 실시

탕평론의

배 경

서경 홍범조의 왕도탕탕, 왕도평평에서 비롯된 용어, 무편무당, 왕권신권의 조화

17C 중엽까지는 붕당을 중심으로 상대방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여 정국이 안정

경신환국에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일당전제화로 변질

붕당정치가 변질되어 환국정치가 되면서, 일부 벌열가문이 정권을 독차지

극단적 정쟁, 공론보다 사리에 집착, 사회분열, 왕권의 약화등이 실시원인

일당전제가 아닌 왕권전제가 탕평론의 본질이자 목표, 17C후반 왕에 대한 타율적 붕당

탕평론

전 개

숙종

조제보합론(명목상탕평) 능력중심의 인재를 기용하여 붕당사이의 화합을 처음 제창,

숙종의 편당적 조치와 노론중심의 일당전제화로 실패

영조

완론탕평책, 온건론자등용, 이조낭관의 낭천권천거권 박탈, 일종의 조제보합론

정조

준론탕평책, 남인시파 고루 기용, 시시비비 엄격!! [정조준]

결 과

붕당간의 세력을 균형화 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하고 정국안정을 꾀하려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



091 정조의 개혁정치


영조의 치적

3

 

 

 

 

 



정조의 치적



왕권강화

영조(18세기)

정조(18세기)

붕당

완화의

추진

탕평책 실시(완론탕평), 탕평교서 반포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 사건 등으로 실패

탕평파(붕당을 없앨 것을 표방)가 정국의 주도,

노론의 절대적 권력 장악

노론 소론을 번갈아 등용하여 정국 더욱 혼란야기

시파와 벽파의 대립 (사도세자 사건)

붕당정치의 폐단을 해결하지 못함

산림의 존재를 부정

이조전랑의 권한약화(3사관원 임명권 폐지)

탕평책 실시(준론탕평), 탕탕평평실(거실)

홍국영을 중심으로 왕권강화 개혁 단행

사림을 중심으로 한 공론중시의 정치가 아닌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관료 정치의 실현

척신, 환관의 제거

세력균형을 위해 권력에서 배제됐던 소론과

남인계열(시파)을 중용, 의리와 명분 중시

벽파 배제, 시파가 정국을 주도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개혁적 인물 위주로 관리 등용

이조전랑의 후임자 천거권 완전폐지

왕권강화

수도방위를 위해서 수성윤음(1751)을 발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

장용영 설치(친위부대) 고위관리X

초계문신제(당하관 이하 능력있는 관리를 재교육)

규장각 설치: 퇴색한 홍문관을 대신해 문형의

상징적존재로 삼음, 서얼 등용, 내각일력 편찬

문체반정: 노론벽파의 신문체를 억압하고 과거의 고문을

사용토록 한 조치, <열하일기>같은 참신한 문장 비판

수령 권한 강화: 군현단위의 향약 직접 주관

토목건축

청계천의 준설 작업과 유로변경 사업

치수사업의 본격적 추진

수원 화성의 건설(수원성): 수원에 축만제와

만석거를 설치하고 대농장(대유둔)을 만듦

서원정리

대폭 정리

없음 *수원으로 사도세자의 묘(현륭원)이전

민생

안정

균역법의 시행(군포 1)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1729)

신문고제도의 부활(1771): 병조에서 담당

노비에 대한 상전의 사형(私刑)금지

노비종모법의 실시(1731)

신해통공(1791):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

폐지 시전상인과 사상의 자유경쟁

시전상인의 활동 위축

*1851년 신해통공: 철종의 서얼허통 정책

법전편찬

속대전

대전통편

문물의

정비

동국문헌비고(홍봉한, 한국학 백과사전)

속오례의, 무원록, 속병장도설, 해동악장

* 일성록: 영조부터 고종까지 조정과 내외

신하에 관련된 일기로 정조가 집대성

동문휘고(외교문서 정리), 규장총목, 고금도서집성

증보동국문헌비고, 탁지지, 추관지, 일성록

규정전운, 무예도보통지, 홍재전서 (정조의

개인문집) 만천명월주인옹자서



* 청계천: 본래 이름은 개천. 치수가 어려워 잦은 물난리를 겪음. 태종 때 정비 사업 시작.

영조 때 준설 작업 외에 하천을 직선화하는 작업을 본격 추진. 19세기 순조와 고종 때에도 하천

정비 사업 계속됨. 일제강점기에 하천의 이름이 청계천으로 바뀜. 대규모의 준설공사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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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였다. (2007년 충북기술직 9급)

11. 이인좌의 난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이다. (2009년 국가직 9급)

12. 영조 때 소론 계열 이인좌의 난으로 한양이 함락되고 왕이 피난길에 올랐다. (2009년 국가직 9급)

13. 영조 때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2007년 광주시 9급)

14. 영조가 즉위한 이후 소론의 정치적 입지가 점차 약화되고 노론이 정권을 주도하게 되었다. (2007년 충북기술직 9급)

15. 3사의 언론 기능은 영조 때에 폐지되었다. (2007년 국가직 9급)

16. 영조 때 증보문헌비고가 편찬, 간행되었다. (2009년 국가직 9급)

17. 정조 때 당파와 관계없이 인물을 등용하는 완론탕평을 실시하였다. (2012년 국가직 7급)

18. 정조는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기구로 육성하였다. (2011년 지방직 9급)

19. 정조 때 시전 상인들이 난전 상인들을 금압할 수 있는 특권을 철폐하였다. (2007년 세무직 9급)

20. 정조는 화성을 세워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2007년 법원직 9급)

21. 정조는 장용영이라는 친위 부대를 창설하여 운영하였다. (2007년 세무직 9급)

22. 정조 때 민(民)의 상언과 격쟁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2012년 지방직 9급)

23. 정조 때 통치 규범을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2012년 국가직 7급)

24. 정조 때에는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하였다. (2011년 해양경찰)

25. 세도 정치 시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 잡았고, 유력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2010년 법원직 9급)

26. 홍경래 난을 계기로 국가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선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각지의 사족들 또한 상소문을 올려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2011년 국가직 9급)

추가 문제

27. 정조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였다. (2011년 지방직 9급)




10. ( X )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11. ( ◯ )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중용되고 소론 일부가 처형되자, 이인좌 등 소론 강경파의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관여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일어난 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12. ( X ) 영조 즉위 직후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고 노론과 소론을 함께 등용하여 대립을 완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소론과 남인의 일부는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노론 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부 반란에 의해 한양이 함락된 것은 이괄의 난이 유일하다. 

13. ( ◯ ) 영조는 사림 세력의 집결지인 서원이 붕당의 근원지라고 보고, 1741년에 1714년 이후 건립된 서원을 조사하여 훼철하게 했다. 

14. ( ◯ ) 영조는 탕평 정치를 통해 붕당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지만 이인좌의 난 등 소론 강경파가 자주 변란을 일으켜 소론의 입장이 약화되었다. 이후에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5. ( X ) 영·정조를 거치며 이조전랑의 특권이 혁파되었다. 붕당 정치를 거치며 3사의 언론기능이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면서 정치적 중요성이 줄어들었지만, 언론 기능 자체가 폐지되지는 않았다. 

16. ( X ) 영조, 정조 때는 국가 체제에 대한 검토와 정비를 위해 대규모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영조 때 편찬된 것은 동국문헌비고이고, 증보문헌비고는 정조, 고종 때까지 편찬 사업이 계속되었다. 

17. ( X ) 당파에 관계없이 왕의 뜻을 따르는 대신들을 등용하는 완론탕평을 실시한 왕은 영조이다. 정조는 각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준론탕평을 실시하였다. 

18. ( ◯ ) 정조는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규장각을 육성하였다. 

19. ( ◯ ) 정조는 상공업 진흥과 재정 수입 확대를 위해 육의전을 제외한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를 신해통공(1791)이라고 한다. 

20. ( ◯ ) 정조는 수원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이곳에 화성을 세워 정치ㆍ군사적 기능을 부여하고,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21. ( ◯ )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22. ( ◯ ) 격쟁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동하는 길가에 지키고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말한다. 정조때 있었던 화성행차는 이런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23. ( ◯ ) 영조 때 『속대전』이 편찬되었으며, 정조 때에는 통치 규범을 정리하기 위해 만든 법전인 『대전통편』을 비롯해 『규장전운』, 『탁지지』, 『무예도보통지』 등이 편찬되었다. 

24. ( ◯ )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는 서얼 출신 학자들로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되었다. 규장각의 검서관은 청요직으로 고위직으로 출세가 가능한 관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얼의 지위 향상과 관련이 깊다. 

25. ( ◯ ) 세도 정치는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소수 가문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소수 가문은 특히 비변사를 중심으로 핵심적인 권력을 차지하였다. 반면 양반들은 권력에서 멀어져 몰락하는 양반들도 등장하였다. 

26. ( X ) 철종 때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수습책으로 특별기구의설치를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862년 삼정의 폐단을 고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이 삼정이정청이다. 

추가문제

27. ( ◯ ) 정조는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젊은 신하를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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