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당쟁의 구체적 전개상 >>>>>>>>>
□ 당쟁의 추이 [ 1 2 경 기 갑 신 이 - 서 남 서 남 소 소 노 ]
주요사건 | 시 기 | 집 권 | 쟁 점 |
1차 예송(기해) | 1659 현종 | 서인 | 효종 승하 ⇒ 조대비 상복문제 서인(기년설)vs.남인(3년설) |
2차 예송(갑인) | 1674 숙종 | 남인 | 인선왕후 喪 ⇒ 조대비 상복문제 서인(대공설,9월)vs.남(기년설) |
경신대출척 | 1680 숙종 | 서인 | 일당전제화, 환국정치, 서인(노론 vs.소론 分) |
기사환국 | 1689 숙종 | 남인 | 숙종이 장희빈소생을 세자책봉 |
갑술옥사 | 1694 숙종 | 소론 | 민비복위문제, 남인 실각 |
신임사화 | 1721 경종 | 소론 | 세자책봉문제 |
이인좌의난 | 1728 영조 | 노론 | 영조집권으로 노론 중용 |
https://www.youtube.com/watch?v=GKFZBda8SHw&t=69s
https://www.youtube.com/watch?v=cPxBNap4vhM
□ 붕당의 체계도
① 동서이척 ② 남북정세 ③ 서남예송 ④ 노소남경 ⑤ 호락논쟁(노론내): 낙동리영자 배우자
|
1. 붕당의 출현 : 선조(1567~1608)
1) 배경: 선조가 즉위하면서 척신 정치 잔재를 청산할 목적으로 향촌에서 세력기반을 다져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
2) 원인: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 문제를 놓고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으로 분당
3) 형성: 사림세력 내부의 정권 쟁탈전(16세기 이후: 임진왜란(1592~8)이전에 발생하여 이후까지 지속)
| 출 신 | 성 향 | 대표자 |
동인 | 신진 사림 | 자기 수양에 중점, 지배자의 도덕적 절제 강조, 척신정치(외척에 의해 주도된 정치) 청산의 개혁에 적극적 | 서경덕, 이황, 조식 |
서인 | 기성 사림 | 백성 통치에 중점,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 개혁에 소극적 상업과 기술발전에 호의적, 노비속량과 서얼허통에 적극적 대신이 주도하는 정치지향(신권강화) 어영청등 5군영을 설치하여 권력기반 확보, 병자호란후 북벌계획 | 이이, 성혼 |
남인 | 동인 | 주리철학 계승, 인간의 내면적 수양을 강조 중소지주와 자영농의 안정을 추구, 왕권강화를 강조 | 이황 |
북인 | 동인 | 임란중 주전론을 펼친명분을 바탕으로 전란후 정국을 주도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정치의 인식차이로 분열 | 조식 |
(1) 원인
① 이조전랑직을 놓고 동인(김효원)과 서인(심의겸) 대립 하다가 분당(직접적 원인)
② 양반의 수는 증가하는데 반하여 관직과 경제적 특권이 한정됨(근본적원인)
※ 이조 전랑직 (전랑 = 정랑(정5품) + 좌랑(정6품)) ① 5품에 해당하는 이조의 관직으로 실력보다 인품 중시, 한미한 가문 출신도 가능 ② 관리의 천거를 담당한 청요직(문관 인사권 + 3사관원 추천권 + 자천권) *무관의 인사는 병조전랑이 담당 ③ 임란 이후 이조전랑과 삼사의 권한 강화, 환국정치 때 권한 약화 ④ 영조때 3사관원 추천권 폐지, 후임자 자천권 폐지 (정조때 완전히 폐지, 이조전랑의 모든 기능 상실) |
4) 붕당의 성격
① 상호비판과 견제세력의 인정 → 정치의 활성화
② 공론 중시: 지배층의 의견수렴(피지배층×), 산림의 출현(붕당정치의 정신적 지주)
→ 효종이후에 북벌을 추진하면서 산림의 정계진출 → 영조때 존재의 부정
.
2. 붕당 정치의 전개
선 조
| 동ㆍ서 분당 | 이조전랑직 문제로 김효원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동ㆍ서 분당 |
남ㆍ북 분당 |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 1589)과 정철의 건저문제 발생(세자책봉 문제)-광해군을 책봉하자. | |
북인 주도 | 광해군과 함께 의병 활동을 주도(정인홍, 곽재우, 김면과 같은 의병장 배출) 왜란 후 전쟁의 책임을 물어 유성룡을 중심으로 남인 정권을 퇴진시키고, 정국을 주도 | |
북인의 분열 | 북인은 중앙 정계에 있어서 기반과 학연ㆍ지연ㆍ순수성 등이 미약.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고, 다시 대북은 육북과 골북으로, 소북은 다시 청북과 탁북으로 분열 | |
광 해 군 | 북인 정권 | 서경덕ㆍ조식 학파, 대북 중심, 서인과 남인의 사회적 기반이 굳건하여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음 |
광해군 실정 | 미약한 정권유지를 위해 칠서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하여 영창대군을 사사(계축옥사)하고 인목대위를 폐위 허균(진보적, 신물문 적극적 받아들임) 칠사사건 화가 미칠거라 예측--폐모론 주도--허균역모혐의(이이첨의 토사구팽일지도) -- 능치저사 | |
광해군의 치적 | 전후 복구 사업: 양안과 호적을 다시 작성, 양전사업과 대동법을 시행 중립외교정책(정통성리학 비판):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적ㆍ실리적 외교정책→ 후금의 침공을 예방함으로써 왜란 후 복구 사업에 크게 기여 5대 사고의 정비(4개가 현존, 춘추관사고✕), 동의보감의 편찬 | |
인조반정 (1623) | 서인이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유폐를 근거로 광해군을 비판,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빌미로 반정을 단행 →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몰아내고 권력 장악. 북인은 다시는 중앙 정계에 등장하지 못함 → 서인이 집권하는 가운데 남인이 견제하는 정국 형성 → 붕당 정치가 더욱 발전 | |
인 조 | 서인집권 |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명분론을 강화하면서 서경덕ㆍ조식의사상, 양명학, 노장사상은 배척하고, 이황과 이이의 주자중심의 성리학을 절대시. 기호학파(주기론), 이이(붕당정치 조정의 노력으로 서인에 가담), 성혼도 가담, 서인과 남인의 상호비판적인 공존체제 유지, 대신이 주도하는 정치지향(신권강화) → 왕권약화, 산림의 강화ㆍ공론의 형성(서원을 중심으로 정치적 여론을 형성) |
친명배금 정책 | 광해군의 중립외교 비판, 존화주의적 명분론에 입각. 후금의 침입(정묘호란, 병자호란) → 삼전도의 굴욕 →북벌론 병권 장악: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이 설치 | |
효 종 | 북벌론 전개 | 복수설치론(삼전도의 굴욕을 씻고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 -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이 중심이 되어 어영청을 근거지로 북벌을 준비 - 결과 : 북벌론은 서인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 |
나선정벌 | 변급(1차), 신유(2차).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 징벌군의 파병, 북벌이 아님 | |
현 종 | 서ㆍ남 대립 | 서인(북벌론 주장) ↔ 남인(북학론): 서인 우세, 남인 견제 |
예송논쟁 | 남인들은 북벌운동의 무모함을 비판하면서 예송논쟁을 일으켜 서인과 대립 사상적 차이에 따라 윤휴,박세당와 송시열이 대립 기해예송(1차 복제문제): 서인의 승리(1년↔3년) * 서인: 왕사동례, 짧다 갑인예송(2차 복제문제): 남인의 승리(1년↔9개월) 남인: 왕사부동례, 길다 [남다르다] | |
* 기축옥사 1. 정여립이 조정에 사직하고 물러난 후, 한준이 서신을 통해 정여립이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고 고변 1)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예를 익히며 모반을 준비한다고 고함. 2) 木子亡奠邑興(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일어난다)이라는 비기참어를 유포하여 세상을 현혹한다고 고함. 2. 결국 조정에서 보낸 군사에 쫒기다 자살, 2년간 1300여 명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을 기축옥사라 함 3. 정철이 기축옥사를 맡아 처리: 의도적으로 확대. * 이괄의 난(1624)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이괄이 우대받지 못하고 좌천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가, 반란이 실패하자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였는데, 이것이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
3. 붕당 정치의 변질(17세기 후반)
1) 배경: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 붕당정치 기반 붕괴, 농업 생산량 증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2) 변질과정
(1) 정치적 쟁점의 변질: 성리학적 관점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 등의 현실적 쟁점으로 옮겨감
(2) 경신환국(=경신대출척 사건: 남인이 기름 천막 유용 사건을 계기로 실각)
(3) 서인의 분열: 경신환국 후 남인 처리 문제와 국가 운영 정책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 노 론 | 소 론 |
중심 인물 | 송시열 중심의 노장파 | 윤증 중심의 소장파 |
학 통 | 이이를 정통으로 계승 | 성혼의 사상 계승 (이이학파 계승의 반발로) |
주 장 | 대의명분, 민생안정 중시 | 실리, 적극적 북방 개척 주장 |
성 격 | 보수적 | 진취적 |
특 징 | 성리학의 절대화(주자중심의 성리학) → 사문난적 배척 |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탄력성 → 양명학과 노장사상에 개방적 → 한말의 국학자 |
기 타 | 호락논쟁의 전개 |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의 재기가 불가능 |
호락논쟁 | 서울: 중상학파→위정척사(일부는 개화파) |
|
충청도: 기 일원론 → 위정척사 |
(4) 기사환국(1690, 남인): 장희빈의 소생(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죽이거나 파직 유배시킴으로써 다시 남인이 집권
(5) 갑술환국(1694, 소론):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계기로 장희빈과 그의 동조세력인 남인
쫓겨나고 서인이 집권하였으나, 노론(이전 집권세력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과 소론(상대적
으로 온건한 입장)으로 분열되어 정쟁의 심화 (완전분열)
(6) 노론의 일당전제화: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장희빈이
사사됨. 소론의 몰락, 노론이 다시 집권
(7) 정유독대(노론,1717): 숙종은 노론의 대신 이이명과 독대. 경종의 대리청정 시작
(8) 신임사화(소론, 경종1년(1721~2)): 연잉군(후의 영조)을 세제에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사건. 목호룡의 고변을 근거로 유배간 노론 중심 인물들을 사사.
(9) 정미환국(영조 3년, 1727): 노론의 추대를 받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탕평책의 일환으로 노론과 소론을 함께
등용하여 당쟁을 막으려고 함. 신임사화의 진상을 통해 다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됨.그러나 노론이 왕의 탕평
책에 잘 따르지 않고 소론을 공격하는 데만 주도하자 다시 소론을 정권에 참여시킨 사건
⑽ 이인좌의 난(영조,1728): 소론(강경파) +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련되었다고
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 →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자를 제거.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되고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 강화, 토착세력에 대한
3) 붕당 정치 변질의 결과
- 일당 전제화(=붕당의 변질): 상대방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가 빈번 → 비판세력을 인정하지 않음
- 환국을 왕이 직접 주도: 왕실 외척이나 종친의 비중 증대
- 정치권력이 당상관을 중심으로 한 고위 관원에게 집중 → 비변사의 기능 강화
- 3사와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 감소: 자기 당의 이익을 직접 대변하는 역할
- 양반층의 분화: 소수의 권반과 다수의 몰락 양반으로 분화 → 패한 세력은 지방 세력화함
- 서원의 남설: 향반의 증가와 함께 특정 가문의 선조를 받드는 사우와 함께 도처에 세워짐 →갑술환국 이후 경상도 지방에서 심하게 나타남
- 왕권의 약화 → 탕평론의 대두(숙종, 영조, 정조): 실패!
4. 학파의 특징
남인 | 이황사상을 계승, 경의 실천을 강조, 대의와 성리학적 명분을 바탕으로 향촌에서 영향력 |
북인 | 조식학통을 계승, 경과 함께 의를 강조하여 절의를 중시, 임란때 곽재우등 의병장 배출 |
노론 | 이이학통을 계승, 송시열을 중심으로 주자중심의 성리학을 절대시, 가장오랫동안 득세 |
소론 | 성혼학통을 계승, 성리학에 대한 탄력적 이해를 시도, 이황에 호의ㆍ이이에 비판적, 양명학을 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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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19 붕당 정치의 성립과 전개
1. 선조 이후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2010 경북교행 9급)
2.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다. (2010년 경찰정보통신)
3. 서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문인이 가담하였다. (2012년 법원직 9급)
4. 서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분화되었다. (2011년 법원직 9급)
5. 조선 현종 대에는 두 번에 걸친 예송논쟁이 일어나 서인이 모두 승리하였다. (2009년 경찰정보통신)
6. 조선 후기 예송논쟁에서 서인은 국왕의 예(禮)에 적용되는 원리가 일반인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2008 지방직 7급)
7. 현종 때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예송이 발생하였다. (2011년 지방직 7급)
8. 숙종 때 지금까지의 당파 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이 대두하였다. (2008년 지방직 9급)
9. 기사환국 시기에 남인이 역모 혐의를 받아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2012년 법원직 9급)
주제 19 붕당 정치의 성립과 전개 OX 정답 및 해설
1. ( ◯ ) 선조가 즉위하면서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온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척신정치의 잔재 청산을 놓고 갈등하였다. 척신정치의 잔재 청산에 대해 명종 이후 정권에 참여해온 기성 사림은 소극적 개혁을,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잔재 청산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2. ( ◯ ) 정여립 모반 사건(1589)을 계기로 1,000여 명의 동인계 인사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세자 책봉문제로 서인이 탄핵당하자 동인은 그에 대한 처벌을 두고 온건파인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3. ( X )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이황, 조식, 서경덕 학파에속한 세력은 서인이 아니라 동인이었다.
4. ( X ) 서인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뒤 정권을 장악하였다. 후에 경신환국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하였다. 정여립 모반 사건은 동인이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5. ( X ) 1차 예송 때는 서인이 승리하였으나, 2차 예송 때는 남인이 승리하였다.
6. ( X ) 예송논쟁은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던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다. 효종 사망 후 자의대비(효종의 계모)의 복식을 두고 서인은국왕의 예가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고 하여 둘째 아들의 예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국왕의 예는 일반인과 다르며 왕이 된 이상장자의 예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 ( ◯ ) 표면적으로는 복상 기간의 논쟁이었으나 실제는 차남으로 왕위를 이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서인과 남인이 권력 다툼을 벌였다.
8. ( ◯ )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해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음에도 어느 한쪽 당파가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견제하고자 3회에 걸쳐 환국을 일으키는 등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9. ( X )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려던 것에 서인이 반대하자 남인을 등용해 서인을 숙청하였다.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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