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 사림파의 계보와 붕당 >>>>>>>>>
№ 084. 사림파의 계보와 붕당
□ 훈구파와 사림파의 비교
□ 4대 사화 [ 무 갑 기 을 - 조 윤 위 왕 ] (깊이출제는 안됨)
□ 정암 조광조의 개혁정치
1. 사림 세력의 등장 : 성종 때 훈구 대신 견제 목적 등용, 주로 3사와 전랑직으로 활동. 2. 사림의 계보 ☞ 조식(북인)ㆍ이황(남인): 영남학파(동인) ⟷ 이이(노론)ㆍ성혼(소론): 기호학파(서인) 3. 사화의 발생 :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대립(15~16세기 과도기), 전반적으로 사림파가 화를 당함 - 무오사화(연산군, 1498): 김일손(사관)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사관(史官)이었던 김일손이 훈구파의 비행과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렸는데, 이전부터 갈등을 느껴오던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것을 문제삼아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하여 김종직문하의 수많은 사림파가 화를 당하게 됨 - 갑자사화(연산군, 1504):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성종의 비)의 복위 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건 연산군의 母 윤씨는 폐비 되었다가 사약(이세좌, 홍귀달)을 받고 죽었는데(성종이 일단 여성편력 심했고, 폐비윤씨도 비상을 예전에 갖고있는듯 문제가 좀 있었음), 여기에 많은 선비들이 관련 이에 임사홍(任士洪)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잔존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사건을 연산군에게 고해바쳐 연산군은 이를 알고선, 그 사건에 관련하여 많은 선비들을 처형하는 한편, 폐비사건 당시의 대신들이었던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남호온(南孝溫)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 (이 사건은 훈구와 사림의 대결이다기보다는 연산군의 단순폭발. 훈구인 한명회도 화를 입는걸 보면..) -----------1506 중종반정(연산군의 배다른 동생)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서 누이를 선택? 딸을 선택?) - 기묘사화(중종, 1519) : 반정에 성공한 중종은 정치를 개혁하고, 패기 넘치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 이에 조광조 등은 중종의 신임을 받아 왕도정치를 실행하고 자격이 없는 공신들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는 등 과격한 혁신정책을 썼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심정, 남곤, 홍경주 등이 음모로 조광조 일파가 민중의 지지를 받아 반역을 꾀한다고 주장하여, 30대 젊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를 옹호한 대신들이 파면되거나 죽음을 당함 ① 중종의 사림 견제 세력 모색 ②‘주초위왕’이라는 글자가 나뭇잎에 새겨진 것을 왕이 보게 함으로 위기의식을 고조시킴 ③ 조광조를 능주로 귀양 보냄 ④ 결과 : 반정 공신세력이 요직을 장악하며 훈구파가 정계 장악, 정치기강과 수취체제의 문란으로 농촌이 피폐, 사림이 낙향하여 서원과 향약 성장, 성리학 발달 *‘조광조의 개혁 정치’ • 도학정치(= 왕도정치) • 현량과(천거제) 실시 - 사림 등용 목적 • 소학과 주자가례 중시 • 소격서 폐지, 승과 폐지 → 배타적 성리학 • 향약(양반에서 천민까지 다포함됨 향촌 공동체) 시행 시도(여씨 향약) - 유향소(난을주도하거나해서) 폐지 주장 • 방납 폐단(공납제폐단) 비판 → 수미법 제기(실행X) • 위훈 삭제(반정공신 중 76명 위훈 삭제) → 주초위왕 사건 → 기묘사화(1519) (남곤, 심정, 김전) *신사무옥 (1521) - 을사사화(명종, 1545): 명종 원년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건 세자(인종)의 외숙인 윤임 일파의 대윤과 경원대군(명종)의 외숙인 윤원형 일파의 소윤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 졌는데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득세. 왕실“외척”의 권력다툼에 의해 발생 * 중종: 장경왕후(오빠 윤임(대윤)) → 인종 vs. 문정왕후(윤원형(소윤)) → 명종 → 사림세력은 또 다시 정계에서 밀려났지만 서원과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확대 - 정미사화(명종, 1547) : 명종 2년에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건, 일명 벽서의 옥(壁書獄) 전라도 양재역 벽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등이 권세를 농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라는 낙서가 발견되자 정권을 잡고있던 이기, 정명순 등이 을사사화 때 제거하지 못한 반대세력들을 고발하여 수백명의 연루자가 화를 입은 사건. - 신임사화(경종, 1721) : 경종 1년과 2년에 노론과 소론의 대립으로 신축년과 임인년에 걸쳐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하며 임인옥(任寅獄)이라고도 함. 심신이 허약한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파 김창집 등의 건의로 왕세제 연잉군(영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실시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있던 소론파의 김일경 등은 노론측이 왕의 신병을 조작하여 발설하였다하여 노론 4대신인 김창집,이건명, 이이명, 조태채를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는 등 옥사를 일으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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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18 사림의 대두와 사화의 발생
1. 조선 전기 훈구파는 중앙 집권에 기여하였다. (2007년 서울시 9급)
2. 훈구 세력은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부와 상공업의 이익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2008년 지방직 7급)
3. 훈구 세력은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예치, 예학 등을 강조하였다. (2008년 지방직 7급)
4. 사림 세력은 과거제를 폐지하고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을 대거 등용하였다. (2009년 지방직 7급)
5. 사림 세력은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였다. (2007년 법원직 9급) ( ◯ )
6. 사림 세력은 향사례, 향음주례의 보급, 사창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2011년 사회복지직 9급)
7. 조선 시대에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2007년 서울시 9급)
8. 김종직은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고 김굉필 등 제자들을 길렀다. (2013년 9급 법원직)
9. 김종직은 소학 보급을 통해 유교 윤리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10. 무오사화는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서 훈구 세력이 산림(山林)을 견제할 목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2012년 지방우정청)
11. 조광조는 도교 및 민간신앙을 배격하였다. (2010년 국가직 9급)
12. 조광조는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고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2010년 국가직 9급)
추가 문제
13. 조선 전기의 관학파는 성리학을 절대 기본으로 삼고 다른 사상을 배척하면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였다. (2008년 지방직 9급)
14. 사림 세력은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경전인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2007년 법원직 9급)
15.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다. (2010년 경북교행 9급)
16. 조광조는 소수서원을 설립하여 유교 윤리를 보급하였다. (2011년 국가직 9급)
17.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따른 정치적 갈등의 결과 사림 세력이 큰 피해를 입었다. (2012년 지방우정청)
주제 18 사림의 대두와 사화의 발생 OX 정답 및 해설
1. ( ◯ ) 훈구파는 세조의 집권 이후에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 체제 강화에 기여하였으며, 세조~성종 대에 걸쳐 경국대전 편찬을 비롯한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2. ( ◯ ) 훈구파는 이미 대지주로서의 기반과 높은 관직을 가진 상황에서 공신으로 봉해진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경제력 독점에 의해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걸쳐 사회 경제적인 모순이 심화되었다.
3. ( X ) 훈구 세력은 세조의 집권 때 공신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학자 관료층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중앙 집권 강화와 부국강병, 왕도정치와 함께 패도정치를 강조하였다.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예치와 예학을 강조한 세력은 사림 세력이다.
4. ( X ) 기묘사림의 주장으로 현량과가 실시되었지만 과거제가 폐지된 것은 아니다.
5. 사림 세력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6. ( ◯ ) 향사례와 향음주례는 사림 세력이 적극 보급한 향약이나 서원과 관련된 행사이다. 사창제는 춘대추납의 빈민 구제 제도로서, 국가가 아닌 민간 차원에서 실시되었으며, 역시 향촌에 기반을 둔 사림 세력과 관련이 있다.
7. ( X )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사화이다. 예송논쟁은 훈구파가 사라지고 사림파가 중앙 정계를 장악한 후에 나타난 붕당정치 과정에서 일어난 논쟁으로, 서인과 남인 세력 간에 일어났다.
8. ( ○ ) 김종직의 문하생으로는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등이 있다.
9. ( X ) 김종직보다 후대에 활동한 김굉필 등 기묘사림과 관련된 내용이다. 김굉필은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10. ( X ) 무오사화는 사림파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훈구 세력이 모함하면서 일어난 사화이다. 연산군 초기(4년)에 벌어진 최초의 사화이며, 왕권이 약화된 상황으로 볼 수는 없다.
11. ( ◯ ) 조광조는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도교 및 민간신앙을 배격하고자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였다.
12. ( ◯ ) 조광조가 건의한 현량과로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3사의 언관직에 진출하였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으로 표방하여 조광조가 건의한 여러 급진적 개혁들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추가문제
13. ( X ) 관학파는 훈구파의 기원이 되는 정치 세력으로, 조선 왕조 개창에 적극 참여하였고,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사상 조류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실시하여 민족 문화 창조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보고 다른 사상을 배척한 것은 사림 세력에 해당한다.
14. ( X )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시한 세력은 훈구파이다. 사림 세력은 일상생활 윤리를 담은 소학을 중시하였다.
15. ( ◯ ) 성종 때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을 경연관으로 삼고 사림을 중용하였다. 사림 세력은 주로 3사의 언관직에 진출하여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였으므로 두 세력의 갈등이 생겨났다.
16. ( X ) 소수서원을 세운 사람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다.
17. ( ◯ )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정치와 반발하여 중종과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거 제거한 사건이고, 을사사화는 훈구 세력 간의 다툼인 대윤과 소윤의 대립으로 대윤파와 일부 사림 세력이 피해를 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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