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 왕대사><가야><삼국항쟁사>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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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8. 21:54 한국사/1 전근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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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삼국시대별 (~ 015)

Cen

고 구 려

백 제

신 라

2C

()기 계 옥 동 현 숙

(국천) 5부족 부자 진대 국

 

 

3C

() 서 오 위

() 기 남 한 6 16

 

4C

() 대 낙 서

(국원) 초 선비 전연



()

() 동 강북 영 왜 호

() 고 마 해 칠 부 가 아직 완 서



() 마라 동진

() 김 광

5C

() 한 경 중 평 광

 

() 부여 최대

()

()

() 결혼 탐라

() 부 나 652

 

() 결 역 시

6C

 

() 남조 22

 

() 22부 노리 지 결렬

() 순 신 왕 우 동

() 본 건 병 상

() 한 대 황 국 비 품 화 개 대 불량 결렬

7C

() 아차 여수 살수 신집

 

() 안 연 천

 

668년 멸망

() 서 미 관

 

() 황 사

 

660년 멸망

()위 예 옥대 걸 세 임신 복 남산

() 여 황9

()덕 집 창 태평

() 진 사 갈

() 통일

() 95 관 공 예 외 국 시 흠

8C

 

* 나제동맹 *

5C(433): 비유 + 눌지

5C(493): 동성 + 소지(결혼)

6C(553): 성왕 - 진흥(결렬)

() 전 누각 最古

() 녹 태 불국

() 대공 最大

 

삼국 왕의 주요 업적

(기틀)마련

(태조왕2)

(고이왕3)

(내물4)

강유역차지

(고이왕3)

(장수왕5)

(진흥6)

대국가완성

(근초4)

(소수4)

(법흥6)

령반포

(고이3)

(소수4)

(법흥6)

부자상속제

(고국천왕2)

(근초고4)

(눌지5)

교수용

(소수4) 전진-순도

(침류4) 동진-마라난타

(눌지5) 고구려-묵호자

사편찬 (삼국사기)


역사서의 경우 삼국사기 이전의 것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쪽만 정치사랑 연관되기에 중요)


(근초), 서기-고흥

(진흥), 국사-거칠부

(영양7), *유기(소수림왕)

유기100신집5-이문진

최대영토

(근초고왕)

(문자왕)

(진흥왕)

귀족회의

(제가회의)

(정사암회의)

(화백회의)

수상

(대대로)

(상좌평)

(상대등시중)

지방제도

55,3

55,22담로

65,2소경


1. 건국순서: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앙집권국가의 형성은 고, , 신의 순서




https://www.youtube.com/watch?v=q9_BYX66FE0&index=15&list=PLTueiRDhYZ6LZZIdt4GT6OtymLB77GKaE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고구려의 처음성립(연맹왕국) 동명성왕(주몽)

1) 태조왕(1~2C)

- 기틀마련, 중앙집권국가의 형성(여러 집단들이 5부 체제로 발전)

- 왕위세습(계루부(전에는 소노부), 형제상속), 옥저동예 복속(영토확장)


2) 고국천왕(2C)

- 부자상속제의 확립, 진대법 실시, 부족적 전통의 5부를 행정적 5부로 개편





3) 동천왕(3C): 오와의 통교를 바탕으로 위를 견제, 서안평 공격 실패, 위장 관구검의 반격으로 수도함락





4) 미천왕(4C)

- 서안평 점령(중국의 516국 시대로 정치적 분열기), 낙랑군 축출(중국세력의 축출), 대방군 복속


5) 고국원왕(4C 중반): 선비족(전연)인 모용씨가 침입하여 수도 함락, 평양성에서 근초고왕에게 패사


6) 소수림왕(4C 후기)

- 전진과 수교(372), 불교 공인(전진의 순도)

- 태학 설립(최초의 국립대학, 상류층 입학), 율령 반포관복 제정(고대국가 완성)

- 백제와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으며,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함






7) 광개토대왕(4C~ 5C): 연호 사용(영락, 연수)

- 왜의 격퇴(400):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근거: 호우명 그릇) 전기 가야연맹 해체의 결정적 계기

- 후연 격파 요동지역 확보(중국의 516국 정치적 분열기), 한강이북진출, 거란정벌, 동부여 복속


8) 장수왕(5C): 중국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하여 중국과 교통하면서 남진정책을 추진

- 광개토대왕비(=호태왕릉비) 건립(414): 세계의 중심이라는 천하관 반영, 중국퉁구 집안현(평양X), 예서체, 1880년에 발견 (일제강점기X)

- 평양천도(427): 평양천도 이전(남북조, 북방 민족과 다면외교), 평양천도 이후(남하정책)

- 백제 수도인 한성(위례성) 함락 남한강유역 차지(중원고구려비)

- 경당 설립: 사학, 무술 교육, 평민 입학, 개항이후에 성립된 원산학사와 비슷


9) 문자왕(5C~ 6C): 부여 복속(494), 고구려의 최대영토 확보






10) 영양왕(7C): [신집]5(이문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수나라 문제 섬멸),

*영양왕 연계: 온달의 전사가 영양왕 원년에 있었던일// 수나라의 요서지역을 고구려가 선제공격


11) 보장왕(7C): 안시성싸움, 연개소문의 천리장성(부여성~비사성)

* 고구려의 정복 순서 : (옥저) (요동) (남한강) (부여)의 순으로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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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의 성립과 발전 : 근초고왕 때 우리나라 역사상 해외진출이 가장 활발함

1) 고이왕(3C)

- 중앙집권국가 형성, 한강유역 장악, 율령 반포, 관등제 정비(16관등), 정치체제정비(6좌평), 관복제 도입

- 형제 상속의 왕위 세습, 남당 설치, 낙랑과 대방군을 공격






2) 근초고왕(4C)

- 부자상속제의 확립, 마한의 완전 정복, 담로제의 실시

- 전라도 장악: 마한의 소국들을 정복.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 낙동강 유역에 가야에 대해서 지배권 행사, 동진과 수교, 일본에 아직기 파견, 칠지도 하사(368)

- 요서지역 점령, 산둥반도, 일본 규슈 지방까지 진출하여 고대 상업 세력권을 형성 cf. 요동은 고구려 점령중

- 고흥(서기 편찬)


3) 침류왕(4C): 동진(마라난타)에서 불교의 수용





4) 개로왕 : 장수왕에 의해 전사, 5C에 북위에 국서를 보냄(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 백제가 중국의 북조와도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근거.

- 백제의 한문학의 발전을 보여줌.


5) 문주왕(475~477) : 웅진으로 천도(475, 고구려의 평양천도(427)가 먼저 이루어 짐), 왕권약화


6) 동성왕(479-501) : 왕권강화,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493), 탐라국 정복







7) 무령왕(6C) : 22담로 지방세력의 통제 (*무령왕이 처음 설치X, 담로는 한성시대부터 존재)

- 중국 양나라와 수교(521), 사신을 파견하여 영동대장군의 작위를 받음

- 5경 박사의 파견 : 단양이와 고안무를 각기 일본에 파견


8) 성왕(6C) : 사비로 천도, 국호를 남부여로, 왕족의 성을 부여씨로 바꿈

- 5, 5방의 지방 제도를 정비, 22부의 중앙 관청을 확대, 정비

- 겸익 등의 승려를 등용(소승불교), 일본에 불교전파(노리사치계 파견),

- 중국 양나라와의 국교강화, 일본과의 교류 활발

- 한강하류의 일시회복 진흥왕의 배신으로 상실 ·제동맹의 파기(553), 신라를 공격하다가 옥천 관산성에서 전사






9) 무왕(7C) : 미륵사와 왕흥사의 건립(익산으로 천도 추진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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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의 성립과 발전

1) 내물왕(4C) : 형제상속, 영토확장(낙동강 지역의 진한 지역 거의 차지), 전진과 수교(고구려를 통해서)

- 고구려군의 신라 주둔: 왜구(399)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안에

머물기도 하였음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과 호우명 그릇






2) 눌지왕(5C): 백제의 비유왕과 나·제 동맹 체결(433), 왕위 부자 세습,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불교의 전래(457)토착신앙으로 인해 융성하지 못함


4) 소지왕(5C후반) : 우역의 개설(487), 6부의 행정 구역 마련, 시장의 개설, 백제 동성왕과 결혼동맹






5) 지증왕(6C) : 한화정책(, 신라로 개정), 우경의 실시(장려)

- , 군을 정비하고 주에 군주를 파견, 우산국 정벌: 이사부를 최초의 군주로 삼음

- 동시전설치(통일신라 : 동시, 서시, 남시의 설치.번성) : 시장 감독 기관

- 순장을 법으로 금지


6) 법흥왕(514~540) : 연호의 사용(건원)

- 병부를 설치(최초), 상대등 설치(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

- 율령반포 : 17관등제 및 백관의 공복을 정비, 골품제도가 정비됨

- 불교의 공인(527) :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가 공인, 불교식왕명(법흥왕~진덕여왕)

- 금관가야(본가야)의 복속(532). 백제를 통해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수교


7) 진흥왕(540~576)

- 한강유역 차지 : 상류(단양적성비), 하류에 신주 설치(북한산비) 당항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직접 교섭

- 대가야의 복속, 함경도 진출(황초령비, 마운령비, 568)

- 황룡사의 건립, 화랑도의 정비, 연호사용(개국, 대창, 홍제)


-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함

- 관제의 정비 : 재정 업무 담당 관청으로 품주를 설치(565)

- 불교교단 정비(황룡사, 홍륜사 등의 사찰 건립), 국통(최초는 고구려에서 온 승려 혜량)신라에만 존재


8) 진평왕(579~632)

- 관제 정비 : 위화부, 조부, 예부 등을 설치

- 수와 통교 : 원광법사를 통하여 수나라에 걸사표를 바침. 세속오계 : 원광법사가 화랑도에게 내린 규율







9) 선덕여왕(7C 전반)

- 당과의 통교

- 승려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백제의 아비지)


10) 진덕여왕(7C 중반)

- 왕권강화: 선덕여왕 말기의 진골에 의한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연호를 태화라고 함

- 관제 정비: 품주를 창부와 분리하여 집사부로 고침, 당과 교류 활발(나당동맹,648):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 원조를 부탁, 왕이 지은 태평송을 비단에 새겨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을 시켜 고종에게 바침

- 중국식 복제와 연호 사용: 649년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 650년 독자적 연호 대신 중국의 연호를 받아들임


11) 무열왕

 

12) 문무왕(7C) : 고구려 정복(668), 당군 격퇴(매소성, 기벌포) 삼국통일

 

13) 신문왕


https://www.youtube.com/watch?v=uimi7tv1swY&list=PLTueiRDhYZ6LZZIdt4GT6OtymLB77GKaE&index=23

 




№ 010 가야의 성립과 발전

1. 전기가야연맹은 23c 김해부근의 금관가야(본가야중심으로 변한지역에서 성장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교통을 이용하여 왜의 규슈지방을 연결하는 원거리 중계무역으로 성장발달


2. 신라와 함께 토착세력이 이주민 세력을 통합하면서 발전


3. 4~5C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전기가야 영역이 낙동강 서쪽연안으로 축소

→ 5C이후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의 형성

→ 고구려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신라백제와 동맹하여 전쟁에 참여하기도 함

→ 6C 대가야는 중국남조에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와 혼인동맹(522, 이뇌왕 법흥왕), 백제신라와 거의 대등한 세력


4. 가야 연맹의 쇠퇴

전기 가야연맹의 약화: 4C초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의해 약화 → 5C초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해체

후기 가야연맹의 약화: 6C 초반 백제와 신라의 압박 강화

백제와 연합하여 저항백제성왕이 이끄는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관상성에서 신라군에 패배(554)


5. 가야 연맹의 멸망 (중앙집권국가로 발전X)

금관가야 멸망(532): 법흥왕에게 금관가야가 항복대가야 멸망(562): 진흥왕에게 대가야 항복


6. 가야의 경제벼농사 발달토기 제작 기술의 보급(신라와 일본 스에키 토기에 직접 영향),

중계무역 발달(낙랑과 규슈지방 연결)


7. 유물과 유적함안 말이산 고분부산 복천동 고분창녕 계남리 고분고령 지산동 고분 등

독무덤널무덤돌덧널무덤 등 출토(돌무지 덧널무덤X), 철제 무기와 갑옷수레형 토기벽화 등 발굴

- [개황록]은 가야유민이 쓴 역사서로 후에 삼국유사에 인용됨


8. 김유신 등 금관가야의 유민들이 신라의 문화발전과 삼국통일에 기여우륵(가야금), 강수(유학),

김암(둔갑술거문고(고구려의 왕산악이 중국 진의 7현금을 개량)



№ 016 삼국의 항쟁과 신라의 삼국통일

살수대첩(612)당건국(618)

안시성싸움(양만춘,645)

나당연합(648)백제멸망(660)

백제부흥운동(660)계림도독부(663)웅진도독부(664:설치는 660이나 부여융이 정비한시기는 664)고구려멸망(668)

안동도호부(668)고구려부흥운동(668)석성전투(671)소부리주설치(671)마전적성전투(675)매소성전투(675)기벌포전투(676)

 

1. 고구려와 수의 전쟁 고구려가 먼저 요서지방을 공격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



2. 고구려와 당의 전쟁

1) 천리장성(7C) : 연개소문이 당의 침략에 대비 (부여성 비사성)

고려(덕종 정종, 11C) : 북방(거란과 여진침입을 대비 (압록강 도련포)

2) 연개소문양만춘 등이 안시성 대첩(645)에 의해 격퇴



3. 백제 멸망(660)

1) 부흥운동의 전개(660 ~ 663)

주류성(복신도침), 임존성(흑치상지)에서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킴

- 200여성을 회복하고 왜의 수군이 지원(백강전투)했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으로 실패

부흥운동 진압후 당은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계림도독으로 임명하과,

웅진에도 도독부를 설치하여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664)



4. 고구려 멸망(668)

1) 부흥운동의 전개(668 ~ 671)

검모잠(한성재령), 고연무고연수(오골성)가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 전개

신라의 후원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였으나 안승이 신라로 망명하면서 좌절

당은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임명(674)



5. 당 전쟁(668 ~ 676)

1) 원인(당의 지배 야욕및 결과

계림도독부 설치(663): 신라 땅을 지배하기 위해 경주에 설치 하고 문무왕을 도독으로 임명

웅진도독부 설치(664): 백제 땅에 설치 하고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 웅진은 지금의 공주

안동도호부 설치(668): 고구려 땅을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설치 하고 설인귀 임명,

기벌포전투 후 당군을 대동강 이남에서 완전히 축출 (평양  요동)

삼국통일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차지(676)



6. 삼국통일의 한계성

1)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으로는 완전한 통일이지만영토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국경선 대동강 원산만 이남)

2) 외세 의존적이라는 한계

 

※ 삼국의 전성기항쟁기

• 4C(백제전성기): 중국의 516국 시대로 전진~고구려~신라의 북방연합과 동진~백제~왜의 남방연합

• 5C(고구려전성기): 중국의 남북조시대로 고구려~남북조연합으로 남하정책 실시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 체결

• 6C(신라전성기): 중국 수통일기로 고구려는 돌궐백제와 연합세력 구축

• 7C(삼국통일기): 중국의 수당 통일기로 돌궐~고구려~백제~왜의 남북진영과 수~신라의 동서진영의 대립

 

 

 

참고) 

위키피디아 삼국통일

나무위키 삼국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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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6 고대 국가의 성립

1. 백제 건국 세력이 부여 고구려계임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건국 신화에서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2009년 국가직 9급)

2. 백제 건국 세력이 부여 고구려계임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백제 왕족의 성이 부여씨이다. (2009년 국가직 9급)

3. 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임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은 공주 송산리 고분이다. (2011년 국가직 7급)

4. 백제의 관등은 복색제와 연관되어 공복의 색깔도 관등에 따라 3색으로 구분되었다. (2010년 국가직 7급)



주제 6 고대 국가의 성립 OX 정답 및 해설

1. ( ◯ ) 기록에 의하면, 백제를 세운 온조는 형인 비류와 함께 고구려 주몽의 아들들이었는데, 주몽이 부여에서 낳았던 아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오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따르는 신하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한강 유역과 인천 부근에 각각 나라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 ◯ ) 부여를 성씨로 삼은 것은 주몽이 부여에서 온 이민 세력이었고, 백제를 세운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3. ( X ) 백제 건국세력이 고구려계임을 보여주는 고분군은 서울 석촌동에 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무령왕릉을 비롯한 웅진 시대 왕들의 무덤이 몰려 있다. 

4. ( ◯ ) 백제 고이왕 때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관등의 명칭(솔계, 덕계, 기타)과 관복의 색깔 구분(자주색, 빨간색, 푸른색)을 통해 볼 때, 관리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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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7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계

1. 고구려 미천왕은 5대10국이라는 중국 대륙의 분열 상황을 틈타 낙랑군·대방군을 점령하였다. (2008년 국가직 7급)

2. 고구려 고국천왕 때 왕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은 점차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체제가 형성되었다. (2008년 서울세무직 9급)

3. 4세기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주는 유물은 칠지도이다. (2008년 국가직 9급)

4. 4세기 초에 백제의 왕권이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2009년 법원직 9급)

5. 4세기 초에 신라는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2009년 법원직 9급)

6. 근초고왕 시기 신라는 우산국을 정복하고 경상도 북부와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2013년 9급 기상직)

7. 근초고왕 시기 고령의 대가야는 소백산맥 서쪽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2013년 9급 기상직)

8. 백제는 근초고왕 때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2012년 경찰 2차)

9. 신라에서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하던 시대에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켰다. (2011년 기상직 9급)

10. 신라 내물왕은 마립간이란 왕호를 썼는데, 왕호에는 무당, 제사장이란 의미가 있다. (2011년 서울시 9급)

11. 고구려 소수림왕은 형제 상속이던 왕위 계승을 부자 상속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2011년 서울시 9급)

12.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전진과 수교하여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고 태학 설립, 불교 수용,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강화하였다. (2012년 서울시 9급)

13. 광개토 대왕 시기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14. 광개토 대왕 이후 고구려는 낙랑을 완전히 몰아내고 만주 지방에서 대규모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2008년 서울세무직 9급)

15. 광개토 대왕 시기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16.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은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으로 진출하였다. (2010년 국가직 9급)

17. 광개토 대왕릉비 비문에는 건국 시조가 해와 달을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고 하였다. (2009년 국가직 7급)

18.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광개토 대왕이 침략해 온 북위를 크게 무찔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010년 9급 국가직)

19.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광개토 대왕이 새로 개척된 영토를 순수하고 민심을 수렴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07년 국가직 7급)

2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에 놓고 신라를 종속된 나라로 인식하였음을 알 수 있다.(2007년 국가직 7급)

21. 충주고구려비는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고구려의 영토 범위를 알 수 있다. (2011년 지방직 9급)

22. 광개토 대왕릉비, 중원고구려비, 단양적성비, 진흥왕순수비에는 율령 반포 내용이 있다. (2006년 국가직 7급)

23. 광개토 대왕릉비단양적성비울진봉평비사택지적비 순서로 만들어졌다. (2008년 국가직 7급)

24.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는 등 세력을 넓혔다. (2012년 경찰 1차)

25. 장수왕은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고 남양만 일대까지 판도를 넓혔다. (2008년 선관위)

26.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2011년 서울시 9급)

27. 백제 동성왕은 신라 왕족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나ㆍ제 동맹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 (2008년 국가직 7급)

28. 자비왕은 주(州)와 군(郡)의 지방 행정 구역을 정리하고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2008년 선관위)

29. 영일 냉수리 신라비와 울진 봉평 신라비에 의하면 왕은 소속부의 명칭을 띠고 있었다. (2011년 국가직 9급) 

30. 신라 지증왕 때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2012년 국가직 9급)

31. 5세기 신라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2013년 9급 기상직)

<해설> ( X ) 법흥왕(재위 514∼540년)이 병부를 설치한 시기는 6C이다. 

32. 신라 진흥왕의 대외 정복 사업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비석은 임신서기석과 북한산순수비이다. (2008년 지방직9급)

33. 신라 진흥왕 이후 백제는 한강 유역을 수복하고 중국으로 진출하였다. (2010년 기상직 9급)

34. 신라는 진흥왕 대에 금관가야를 정벌하고 가야 지역을 석권하였다. (2008년 국가직 7급)

35. 백제의 무령왕은 22담로를 설치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2011년 서울시 9급)

36. 무령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수복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다. (2008년 선관위)

37. 백제 성왕은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였다. (2011년 국가직 9급)

38. 5세기 백제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천도하였다. (2013년 9급 기상직)

39. 진덕여왕 사망 이후 신라는 성골 골품이 소멸하였다. (2011년 사회복지직 9급)

40. 대가야의 왕릉급 고분이 몰려 있는 곳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다. (2012년 경찰간부후보)

41. 창원 남성골 유적과 연천 호로고루 성터, 서울 광진구 아차산 보루 유적은 고구려의 남진과 한강 유역 지배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2012년 경찰간부후보)

42. 가야 연맹은 4세기 말~5세기 초에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영역이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2006년 선관위)

43. 김해 지방 가야 세력은 철의 생산과 벼농사 발달 및 해상 교통의 유리함에 힘입어 전기 가야 연맹의 주도권을 잡았다. (2008년 지방직 7급)

44. 가야는 일본의 규슈 지방과 가까워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여 소국을 건설하였다. (2008년 지방직 7급)

45. 5세기 후반 김해 지방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다. (2006년 선관위)

46. 6세기 초에 고령의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2011년 지방직)



주제 7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계 OX 정답 및 해설

1. ( X ) 고구려의 미천왕은 중국에서 일어난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서안평을 점령하고 낙랑과 중국의 교류를 차단, 결국 낙랑군을 축출하였다(313). 5대 10국은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송(960년 건국)이 중국을 통일하는 979년까지의 시기이다. 

2.해설> ( ◯ ) 고구려의 경우 5부는 계루부, 연(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인데, 고국천왕 때 이들 5부족 체제를 동·서·남·북·중(내)의 행정 구역을 나타내는 5부 체제로 개편하였다. 

3. ( X )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유물은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이 있다. 이외에도 광개토 대왕릉비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 칠지도는 백제와 왜의 관계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4. ( ◯ ) 4세기 초 근초고왕 때 백제는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5. ( X ) 신라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고구려 군대의 도움을 받았던 때는 4세기 초가 아니라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일이다. 

6. ( X ) 신라 지증왕 13년(512)의 일이다. 

7. ( X ) 대가야가 소백산맥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은 5세기 후반의 일이다. 

8. ( ◯ ) 백제는 근초고왕 때 왕위 부자 상속을 이루고, 마한 전 지역을 확보하였으며 고구려를 공격하여 황해도 지방을 점령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서, 산둥 진출에 대해 그 지역을 점령하여 지배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다. 

9. ( X )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내물마립간부터 사용하였으며,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비하고 우산국을 복속한 것은 이후인 지증왕 때의 일이다. 

10. ( X ) 이사금은 연장자, 마립간은 대군장을 칭하는 말이다. 무당, 제사장의 의미가 있는 왕호는 차차웅으로, 2대왕인 남해가 이 호칭을 썼다. 

11. ( X ) 고구려의 왕위 계승은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가 독점하게 되었으며, 고국천왕 때 왕위의 부자 상속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이 왕위를 이었다. 이후 산상왕의 아들(동천왕)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12. 소수림왕은 고국원왕 때의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전진과 수교하고, 불교 공인,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13. ‘영락’은 광개토 대왕 치세의 연호이다. 

14. 광개토 대왕 이전의 미천왕은 중국에서 일어난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서안평을 점령하고 낙랑과 중국의 교류를 차단, 결국 낙랑군을 축출하였다(313).

15. 광개토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 때의 일이다. 장수왕은 427년(장수왕 15)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백제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16. ( ◯ ) 광개토 대왕은 북으로 거란, 숙신, 후연, 동부여 등을 공략하고 남으로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17. ( X ) 광개토 대왕릉비 비문이나 모두루 묘지명 등에서 추모왕(주몽)을 황천지자(하늘의 아들)이자 일월의 아들인 하백의 외손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18. ( X ) 광개토 대왕은 북으로 거란, 숙신, 후연, 동부여 등을 공략하고 남으로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북위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9. ( X ) 중원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순시를 기록한 비석은 아니며, 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이 잘 나타난 비석이다. 

20. ( ◯ )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왕을 대왕으로, 신라왕을 동쪽 오랑캐나 매금으로 표시하였는데, 이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며 신라로부터 조공을 받는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21. ( ◯ ) 고구려의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충주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22. ( X ) 중원고구려비와 적성비, 순수비는 영토를 개척한 후에 국경 지대에 세운 척경비의 성격을 가지며, 광개토 대왕릉비는 영토 확장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국가들이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23. ( X ) 광개토 대왕릉비(414), 울진봉평비(524), 단양적성비(551), 사택지적비(654) 순서로 만들어졌다. 

24. ( ◯ ) 고구려의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중원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25. ( ◯ ) 중국에서 5호 16국의 혼란기가 지나고 남조와 북조가 성립되어 어느 정도 정세가 안정되면서, 장수왕은 남북조와 교류하며 중국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남진 정책을 펼쳐 아산만,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다. 

26. ( X )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백제 개로왕은 472년 국서를 보내 북위의 세력을 이용해 고구려의 남침을 막으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결국, 475년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은 살해당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27. ( ◯ )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펼치자 백제와 신라는 나·제 동맹을 맺었으며(433) 신라 소지왕 때는 백제 동성왕과 이찬 비지의 딸이 결혼하여 결혼 동맹을 맺었다. 

28. ( X )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여 국가 권력이 지방에까지 미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로는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킨 왕은 지증왕이다. 

29. ( ◯ ) 영일 냉수리 신라비는 지증왕 때의 비석으로 추정되며,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해 놓은 것으로, 지증왕이 왕이 되기 전에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고, 그가 속했던 부가 사탁부였음을 알 수 있다. 

30. ( X ) 신라는 진흥왕 때 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562).

31. ( X ) 법흥왕(재위 514∼540년)이 병부를 설치한 시기는 6C이다. 

32. ( X ) 진흥왕의 정복 사업(영토의 확장)은 단양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북한산비, 창녕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화랑 두 명이 공부에 전념할 것을 맹세하면서 새긴 비석이다. 

33. ( X ) 백제의 한강 유역 장악은 3세기이고, 백제의 중국진출은 4세기 때이다. 6세기에 활약한 신라 진흥왕 때의 백제왕은 성왕이며, 이때 신라에 수복한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34. ( X ) 신라는 진흥왕 때 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562).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금관가야를 정복(532)한 왕은 법흥왕이다. 

35. ( ◯ ) 백제의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36. ( X ) 백제 무령왕은 중국 양나라 및 일본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오경박사 단양이와 고안무를 일본에 보내 문화를 전하였다. 백제의 무령왕이 아니라 성왕이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다(554).

37. ( ◯ ) 백제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개칭하였으며, 내외의 관제를 정비하고 집권적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16관등제와 22부의 중앙 관제를 완비하였으며, 지방은 전국을 동·서·중·남·북의 5방으로, 수도는 전·후·상·중·하의 5부로 나누어 체제를 갖추었다. 

38. ( X ) 백제의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것은 성왕 16년(538년)으로 6세기 때의 사실이다. 

39. ( ◯ ) 진덕여왕 사후에 성골의 왕위 계승이 끝나고, 태종무열왕의 직계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신라 중대가 시작되었다. 

40. ( ◯ ) 대가야 시대의 고분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에 있는 고분군이다. 대량의 토기와 함께 금동관, 갑옷 및 투구, 긴 칼 및 꾸미개류가 출토되고 있어, 4∼6세기경에 축조된 대가야 지배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41. ( ◯ ) 창원 남성골 유적, 연천 호로고루 성터, 서울 광진구 아차산 보루 유적을 통해 고구려의 남진과 한강 유역을 놓고 세 국가가 치열하게 각축을 벌인 역사를 알 수 있다. 

42. ( ◯ ) 전기 가야 연맹은 4세기 초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여 유력한 교역 상대를 잃자 백제에 접근하였고, 백제와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광개토 대왕이 보낸 군사에 의해 패하고 전기 가야 연맹이 붕괴되었다. 

43. ( ◯ ) 가야는 3세기경에는 정치 집단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44. ( ◯ ) 가야는 일본과 가깝고 해상 교역에 능하여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으로 이주한 가야인들이 소국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 가야 양식의 철제 무기와 갑옷, 가야토기에 영향을 받은 스에키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45. ( X )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46. ( ◯ )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응하는 데 집중하였고, 이러한 정세를 틈타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한 후기 가야 연맹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백제, 신라와 세력을 다툴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압박이 가중되어 영토를 상실하였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고립을 탈피하려 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신라와 백제에 점령되면서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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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8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1. 삼국 통일 후 국가 체제의 확대 정비와 관련해서 신라 왕실은 불교식 왕명을 버리고 중국식 시호를 취하였지만, 국가 제도의 측면에서는 종교적 이념에 따라 불교적인 제도들을 도입하였다. (2009년 경찰정보통신)

2. 삼국 통일로 청천강 이남의 확보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 (2011년 해양경찰)

3.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수나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2008년 국가직 7급)




주제 8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OX 정답 및 해설

1. ( X ) 통일 신라는 유교적인 제도를 통치에 이용하였다. 

2. ( X )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토만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대동강 이북의 영토도 발해가 차지하면서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확보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3. ( X ) 수가 일어나자 고구려는 영양왕 때 요하를 건너 요서를 먼저 공격하였다(598). 이에 수를 건국한 문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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