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4 삼국의 고분 (크게보면 신라빼고 돌무지--> 굴식돌방)
[9꿈사 한국사] 2017 공무원 출제순위 10강 - 삼국의 문화 (출제 10위) - YouTube
1. 고구려 1) 초기: (계단식--청동기는 아님)돌무지무덤(=적(누적)석총) - 벽화X, 껴묻거리(부장품)X ⇒ 도굴 당함 - 시기: 청동기(고조선 여대시의 강상묘ㆍ누상묘) ~ 삼국시대 - 장군총: 동방의 피라미드라(큰규모), 화강암을 가공후 피라미드형으로 쌓음(백제한성시대 무덤양식에 영향)
2)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고분) →“돌로 널방을 짜고”,“널방과 앞방을 구분(전실과 현실)” - 벽화발견(초기에는 생활모습 ⇰ 후기 사신도와 같은 추상적으로 변함), 부장품× *현무: 사신도의 하나로 북쪽 방위신 - 강서대묘(2004년에 북한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 강서(수산리)고분: 일본다카마스고분벽화
* 무 령 왕 릉 * • 송산리고분군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발견
• 중국 남조의 양나라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 • 양나라동전인 오수전 발견
•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왕비라는 지석발견 • 벽화는 없고, 많은 부장품 발견
• 현전 최고의 지석으로 도교적 요소반영 • “영동대장군인 백제사마왕은 62세 되는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
- 쌍영총: 서역계통의 영향(여인도, 우차도, 무사도), 팔각기둥 [쌍여우무서, 무용수, 각씨천, 강사] - 무용총(무용도, 수렵도), 각저총(씨름도, 천문도)
2. 백제 1) 한성(위례성) 시대---고구려초기랑 똑같다 (1) (계단식) 돌무지무덤 서울 석촌동고분(벽화X,부장품X) ⇒ 고구려 유이민이 백제를 건국한 사실 입증
(2)굴식돌방무덤: 가락동 고분, 방이동 고분 (석촌동)
2) 웅진시대(규모가 크고 웅장, 소박) (1) 굴식돌방무덤: 벽화○, 부장품X, 송산리 1~5호 고분 고구려 유이민이 백제를 건국한 사실 입증 온조설화, 석촌동고분(돌무지무덤), 5부제행정, 동명왕, 왕족성씨 |
*근데 후기 굴식돌방으로 안넘어간 2개!! (2) 벽돌무덤(전(벽돌)축분): 중국남조의 영향(북조X, 고구려X) *벽화는 없지만 벽돌개개의 무늬는있다. ① 무령왕릉 (벽돌영향 남조 양나라): 껴묻거리 발견, 벽화는X ② 송산리 6호분: 벽화○(사신도, 일월도), 껴묻거리X
3) 사비시기(규모가 작음, 세련)----이땐 다 굴식돌방 (1) 굴식돌방무덤: 벽화○, 부장품×, 능산리고분(금동대향로 출토) (2) 돌무덤, 구덩식 돌곽무덤(돌덧널무덤)
3. 신라 1)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규모가 큼, 마립간시기의 묘제, 주곽+부곽, 단장묘(무덤을 합치는 합장도 안됨.), 벽화×, 부장품○(도굴이 힘드니까...) /// 굴식돌방무덤과 비교유형
- 천마총(155호분): 천마도(마구에 그린 그림--벽화아님), - 황남총 - 호우총: 고구려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 입증(호우명 그릇 발견)
2) 굴식돌방무덤: 통일 이전부터 신라에서도 만듦, 합장○ 벽화○(벽있으니), 부장품× 어숙묘
4. 가야 1) 토광묘(움무덤), 석곽묘 등이 주류. 후기에는 석실분이 많이 축조, 순장풍습○ 2)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고아동 고분(벽화○)
5. 통일신라 (⇒ 벽화X) 1) 화장: 불교의 영향, 백제부터 계승 → 통일신라때 유행 → 16세기이후 침체 문무왕릉 2) 소규모 굴식돌방무덤(세련): 고구려와 백제 영향, 12지신상 조각(도교의 영향) 김유신묘ㆍ성덕대왕릉ㆍ괘릉
6. 발해 (고구려-혜/ 혼합- 효) 문왕의 둘째 넷째딸 1) 정혜공주묘(육정산고분): 굴식돌방무덤(고구려 영향), 돌사자상 발견, 벽화 X, 모줄임천장구조 2) 정효공주묘(용두산고분): 벽돌무덤(당의 영향)--평행고임천장(고구려 모줄임의 일종), 벽화(12인물상, 도교적 요소), 봉토 위에 탑을 만듦, 껴묻거리 발견
7. 특징 1) 삼국은 모두 굴식돌방무덤을 축조 2) 서울 석촌동 고분은 고구려의 유이민이 백제를 건국한 사실을 입증 3)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하였다. 4) 12지 신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 계승 (굴식 돌방무덤) 5) 무령왕릉, 송산리6호분, 정효공주묘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벽 무 효 송] 6) 신라의 무덤에서는 껴묻거리가 발견될 가능성이 많음.(돌무지덧널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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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5 우리나라 금석문
1. 주요 금석문의 순서 [ 영 울 단 북 창 황 마 남 임 ] 신 라 | 중성리 신라비(501) | 지증왕 | 재산분쟁과 관련된 내용, 현존최고의 신라 금석문 | 영일냉수리비(503) | 갈문왕, 신라를“사라”로 기록, 6부족장을“왕”으로 기술 | 울진봉평신라비(524) | 법흥왕 | 율령, 관등제, 노비제 | 영천 청제비(536) | 법흥왕 | 청제저수지 축조 후 저수지 규모와 동원된 사람 등 기록 | 단양적성비(551) | 진흥왕 | 한강상류진출(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 땅 적성점령), 순수비는 아님 | 북한산비(555) | 김정희발견, 한강유역확보, 무학대사비, 나제동맹결렬이 원인 | 창녕비(561) | 대가야정벌(=비화가야정벌) | 황초령비(568) | 윤정현발견, 원산만진출 | 마운령비(568) | 최남선발견, 원산만진출, 유교의 왕도사상을 빌려다가 왕의 업적 찬양 | 남산신성비(591) | 진평왕 | 역제연구, 지방통치, 남산신성축조에 대한 서약 (영토확장과 관계X) | 임신서기석(612) | 진평왕 | 화랑도연구(유학 한학 발달), 한자사용연구(시경 서경 예기 춘추 상서 좌전) | 백 제 | 무령왕릉지석 | | 남북조시대의 해서체로서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 | 사택지적비(654) | 의자왕 | 도교 노장사상, 세월무상 | 고구려 | 광개토대왕비(414) | 장수왕 | = 호태왕비, 3부(주몽설화ㆍ대왕칭송, 정벌, 수묘인), 예서체 (순한문) | 중원고구려비 | 장수왕 | 충북중원(충주,죽령이북)이 고구려 땅임, 신라왕(매금), 평양천도 후 | 조 선 | 백두산정계비 | 숙종38 | 조선과 청의 경계선 확정, 서위압록 동위토문, 간도 |
◇ 광개토대왕비 ◇ 영락9년(399년)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내려갔다.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 아뢰기를“왜군들이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략질을 하니 구원을 요청합니다”하였다. 이에 왕은 영락 10년(400년)에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
◇ 중원 고구려비 ◇ 5월에 고구려 대왕이 상왕공과 함께 신라의 매금(마립간, 왕)을 만나 영원토록 우호를 맺기 위해 중원에 왔으나 신라 매금이 오지 않아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고구려 대왕은 태자공 전부, 대사자인 다우환노로 하여금 이곳에 머물러 신라 매금을 만나게 하였다 |
◇ 사택 지적비(7C) ◇ 해가 쉬이감을 슬퍼하고 달이 어렵사리 돌아옴이 서러워 금을 캐어 귀중한 당을 짓고 옷을 파서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 우뚝솟은 자애로운 모습은 신령한 빛을 토해 구름을 보내고, 뾰족하니 슬픈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
* 낙랑 점제현 신사비(85): 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된 비석 중 가장 오래된 비석. 산신을 제사한 기록, 낙랑군 지역으로 비정하는데 결정적 근거. 일부 이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존재
* 광개토대왕릉비: 한강의 유역의 차지와는 관계없음. 중국집안현 19C 농부에 의해 발견, 삼국의 대외관계 증명 평양천도 이전에 건립(414, 장수왕 2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 지봉유설에서는 고구려유물이 아닌 여진족의 금나라 시조비로 오해
* 영일냉수리비: 눌지왕 27년 또는 지증왕 3년으로 추정, 이두의 성립시기와 성립과정을 추정하는 단서
* 진흥왕 순수비: 중앙집권이후 영토확장을 알려주는 금석문으로 진흥왕의 중앙관제와 지방제도를 알 수 있음 (나제동맹 결렬이후부터 순수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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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0-2 고분과 조각, 건축양식의 발달
1.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처음에는 사신도가 유행하였으나 점차 생활 풍속도로 변화하였다. (2007년 7급 국가직)
2. 사신도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에 많이 그려진 것으로 도교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2012년 지방직 9급)
3. 삼국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을 조영하였다. (2012년 국가직 9급)
4. 돌무지덧널무덤은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주로 분포한다. (2007년 세무직 9급)
5. 서울 석촌동 고분을 통해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 계통임을 알 수 있다. (2009년 법원서기보)
6. 한강 유역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계 유이민임을 반영한다. (2007년 국가직 7급)
7.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세련된 무덤이다. (2012년 지방우정청)
8.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남아 있다. (2012년 지방우정청)
9.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2012년 지방우정청)
10. 통일 신라 시대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발전하여 봉토를 호석으로 두르고 그 호석에는 12지 신상을 조각하였다.(2013년 7급 국가직)
11. 전기 가야 연맹 시대에는 신라와 거의 비슷한 돌무지덧널무덤이 유행하였다. (2011년 지방직)
12. 발해 도성에서 발견된 정혜공주의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무덤 구조와 닮았다.(2007년 국가직 7급)
13. 통일 신라 때에는 미륵 신앙이 성행하면서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2008년 선관위)
14. 통일을 염원하는 신라인들은 각 지방에서 대단히 큰 거불 형태의 불상을 조성하였다. (2009년 경찰 정보통신)
15.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과 신라의 분황사탑은 각각 목탑과 전탑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2007년 7급 국가직)
16. 통일 이후 신라에서는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탑을 쌓는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 양식이 완성되었다. (2008년 선관위)
17. 고려 시대의 탑은 높이가 높아지면서 신라탑보다 균형미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2009년 7급 지방직)
18. 고려의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원나라 탑의 영향을 받았다. (2009년 법원서기보)
19. 고려 시대에는 팔각원당형의 승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들 수 있다. (2012년 지방직 9급)
20.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2009년 7급 지방직)
21.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은 대표적인 고려 시대 주심포 양식의 목조건물이다. (2008년 9급 법원직)
22. 고려 후기의 다포식 건물은 조선 초기의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12년 지방직 9급)
23. 숭례문,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모두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다. (2012년 국가직 7급)
24. 조선 시대는 궁궐, 관아, 성문, 학교 건축이 발달했던 고려 시대와 대조적으로 사원 건축이 발달하였다. (2010년9급 지방직)
주제 30-2 고분과 조각, 건축양식의 발달 OX 정답 및 해설
1. ( X ) 고구려 굴식 돌방무덤의 벽화는 사냥, 씨름 등의 무덤 주인의 생활을 보여 주는 풍속도였으나 점차 사신도 같은 추상적인 그림으로 바뀌었다.
2. ( ? ) 사신도는 대부분 고구려의 고분에 그려져 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방위신은 도교의 방위신으로 사후 세계를 지켜주는 의미가 있다.
3. ( ? ) 고구려의 후기 무덤이 굴식 돌방무덤이다. 백제는 웅진과 백제 시기에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신라는 통일 직전부터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4. ( X )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대표적 무덤 양식으로 경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분포하는 것은 고구려 후기 무덤인 굴식 돌방무덤이다.
5. ( ? ) 서울 석촌동 고분에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 계통임을 보여 준다.
6. ( X )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고유의 무덤 양식이다.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계 유이민임을 보여 주는 것은 백제의 한성 시기 고분들이다. 대표적인 고분은 석촌동 고분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고구려 초기의 돌무지무덤과 비슷한 형태이다.
7. ( X )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세련된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이 아닌 벽돌무덤 양식이다. 백제 무령왕릉을 예로 들 수 있다.
8. ( ? ) 돌무지덧널무덤은 수많은 돌로 널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봉토를 덮은 무덤으로 도굴이 어려운 구조이다. 이 때문에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금관, 금귀거리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었다.
9. ( X ) 돌무지무덤은 벽화를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구조이다. 벽화가 있어서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이다.
10. ( ○ ) 통일 신라 시대에 접어들어 무덤의 양식은 굴식 돌방무덤이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12지 신상을 조각하게 되었다. 김유신의 묘가 대표적이다.
11. ( X )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에만 있었던 양식이다.
12. ( ? ) 정혜공주 묘는 모줄임 양식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하였다. 모줄임 양식은 굴식 돌방무덤의 천장 구조이다. 정혜공주 묘와 비교되는 정효공주 묘는 벽돌무덤 양식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13. ( X )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많이 제작된 시기는 삼국 시대이다.
14. ( X ) 우리나라에서 거불 형태의 불상이 만들어진 때는 고려 초기이다. 이때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이 만들어졌다.
15. ( ? )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이전의 목탑 양식을 모방하여 만든 석탑이다. 분황사탑은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과 비슷하지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은 모전 석탑이다.
16. ( ? )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탑을 쌓는 방식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이다. 이러한 석탑 양식은 신라 중대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양식을 따르는 석탑에는 불국사 석가탑, 감은사지 석탑 등이 있다.
17. ( ? ) 통일 신라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은 기단과 각층의 조화와 비례를 중시하여 뛰어난 균형미를 가지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다각다층탑이 만들어졌는데, 통일 신라의 석탑보다 균형미는 떨어지나 보다 화려하고 개성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8. ( X ) 원나라 탑의 영향을 받은 것은 경천사 10층 석탑이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조선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으로 계승되었다.
19. ( X ) 승탑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무덤으로 신라 말 이래 전형적인 승탑은 팔각형 지붕과 몸돌에 아래의 원형 기둥을 특징으로 하는 팔각원당형이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은 이형승탑으로 사각형 지붕과 몸돌의 보궁형 승탑이다. 팔각원당형의 대표적인 고려 승탑은 고달사지 승탑이다.
20. ( X )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고려 후기의 것이 맞지만,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다.
21. ( X ) 사리원 성불사 응진전은 다포 양식이다. 주심포나 다포는 지붕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장식인 공포 형태에 따라 나뉜다. 주심포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양식이고, 다포는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양식이다.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안동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이 유명하다.
22. ( ? ) 다포식 건물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공포를 두었고 건물의 외양이 화려하였다. 이런 건축 기법은 조선 초기의 궁궐, 성문 등 공공건축 건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23. ( X ) 숭례문은 남대문의 정식 이름으로 조선 초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고려 말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24. ( X ) 조선 초기에 궁궐, 관아, 성문, 학교 건축 등이 발달하였고 대표적인 건축물로 경복궁, 평양 보통문 등이 있다. 사원 건축이 발달하였던 때는 고려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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