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대외관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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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8. 22:36 한국사/1 전근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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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 조선전기 대외관계

1. 명과의 관계

1) 사대교린 정책: 사대정책을 추진하였으나 내정간섭이 없는 자주적 실리외교

2) 건국 초기 외교관계

- 태조: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 정벌 계획과 여진문제로 인하여 갈등관계가 유지

- 태종: 양국의 관계과 친선관계로 바뀌면서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

- 무역관계: 사행 무역(공무역)이 주를 이룸. 1년에 수차례 정기, 비정기 사절단을 파견

- 명에게 조공을 피하기 위해 금광과 은광을 폐쇄, 사치스러운 견직물의 수입으로 국내 수공업이 위축

조선후기 청과 교류하면서 은광이 활기

- 16C 사림이 집권하면서 존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변질됨

정기 사절

비정기 사절

하정사(정월초) 동지사(동짓날연말)

성절사(황제생일) 천추사(황후태자생일)

진위사(황제황후 상사) 사은사(감사)

진하사(황제등극태자책봉) 주청사(주청)



2. 여진과의 관계 : 적극적 외교 정책, 교린 정책에 입각하여 회유와 토별의 양면 정책을 추진

1) 회유정책

- 귀순 장려, 북평관 설치(한성에 여진 사절이 머물 유숙소), 국경지대에서 조공 무역을 일부 허용.

귀순한 여진족에게 관직이나 정찰할 수 있는 토지와 주택 제공

2) 토벌정책

- 여진의 잦은 국경 침입 : 국경에 진, 보 등을 설치, 토벌대를 파병

- 태종: 일찍부터 두만강 유역을 개척

- 세종: 4(최윤덕, 여연우예자성무창) 6(김종서) 개척 = 현 국경선의 확보

- 세조: 신숙주윤필상 등으로 하여금 압록강두만강 일대 여진을 토벌, 4군이 철폐되어 국방선이 후퇴.

남이장군이 여진토벌 할 때 읊은 시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3) 사민정책 실시: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백성을 북방(함경도, 평안도)으로 강제 이주

- 통일신라도 시행됨,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

- 토관제도를 보완책으로 실시

함경도와 평안도의 일부지역에는 관리를 자기출신지에 임명하는 경우도 있음

상피제도의 모순, 토관은 중인에 포함



3. 일본과의 관계 : 교린 정책

1) 토벌 정책 : 대마도(쓰시마섬) 정벌(1419) - 이종무(세종) cf) 박위(고려말)

2) 교린 정책(회유책)

- 삼포개항(1426) :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제포(진해)가 개항.

3) 해동제국기 : 신숙주가 일본 등에 다녀와서 쓴 견문기



4. 동남아시아와도 교류

1) 조선 초기 류큐(오키나와), 자바(인도네시아), 시암(타이)등 동남아 여러 나라와 교류

2) 특히 류큐의 문화발전에 큰 기여

* 사신의 숙소

1) 북평관 : 조선에 있는 여진족 사신의 숙소

2) 동평관 : 조선에 있는 일본 사신의 숙소

3) 태평관 : 조선에 있던 명 사신의 숙소

4) 회동관 : 중국에 있던 조선사신의 숙소

.



081. 조선시대 일본과의 관계 [ 쓰시 3계 삼포 임신 사 정 을 왜 (모르나) ]

1) 쓰시마섬(대마도)의 정벌: 김사형(태조), 이종무(세종, 기해동정) (* 박위의 쓰시마섬 정벌은 고려말 공양왕)


2) 삼포개항(1426):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제포(진해) cf) 제물포 X


3) 계해약조(1443): 세견선 50, 세사미두 200- 제한된 조공무역 허락


4) 삼포 왜란(중종, 1510): 비변사의 설치(병조 예하 임시기구) - 여진족과 왜구의 침략에 대비, 군무만 담당


5) 임신약조(1512): 계해약조의 1/2(세견선 25, 세사미두 100), 제포만 개항


6) 사량진 왜변(1544): 무역 단절, 일본인 왕래 금지 조치


7) 정미약조(명종, 1547): 세견선 25, 위반 시 벌칙 강화


7) 을묘왜변(1555)): 국교단절 비변사의 상설기구화, 일본의 사죄세견선 5척 허락


8) 임진왜란(선조, 1592): 왜란중 훈련도감 설치, 비변사의 최고 기구화

* 비변사 [삼을임]

1. 구성: 도제조, 제조, 낭청으로 구성

1) 도제조: ·현직 의정들로 구성. 정책을 결재하는 정도의 형식적 기구

2) 제조: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 , 강화유수, 대제학, 5군문 대장(5군영 대장) 등 국방에

능통한 관직자로 구성. 비변사의 운영을 주도

3) 낭청: 비변사의 행정 실무를 관장

2. 역할: 전후 복구와 붕당 간의 이해관계 조정 목적 양난 후에도 구성과 기능은 그대로 유지

3. 결과: 비변사 기능강화(왕권약화, 의정부와 6조 기능약화) 19C이후로는 노론 일당 독제와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등의 세도 정치의 중심 기구 역할을 수행

4. 혁파: 흥선대원군이 집권(1864)하면서 비변사를 혁파하고 의정부와 삼군부 부활


9) 정유재란(1597): 노량 해전


10) 통신사의 파견 (1607-1811, 공식적으로는 임란이후부터 순조 때까지 비정기로 총 12회 파견)

- 명칭: 보빙사, 회례사, 통신관, 경차관 등 다양 1413년 태종 때 통신사

- 목적: 임란전(왜구금지요청), 임란후(강화와 포로송환, 일본국정 탐색), 1636(인조, 막부장군 승진 축하)

- 막부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해주는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 조선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파.

- 에도 막부의 쇼군이 바뀔 때마다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조선에 사절단 파견을 요청

- 19C 일본에서 반한적인 국학운동의 발전으로 1811년의 통신사를 마지막으로 조일국교는 단절

- 1867년 메이지유신 이후 왕정복고를 조선에 알리고 국교를 요청하였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

척왜정책과 함께 서계문제가 발생하여 국교를 거절하자 일본에서 정한론 대두

- 조선에서 정기적으로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단(X), 일본 왕이 바뀔때 축하사절(X)


11) 기유약조(1609) : 부산에 왜관을 다시 설치.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 허용

- 국교의 정상화 광해군 때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의 완화

- 무역량의 감소(세견선 : 20, 세사미두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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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전기에 명과는 조공 관계를 통해서 문물을 받아들이고 경제적 실리를 취하였다. (2012년 지방우정청)

2. 변경 지역인 평안·함경 양도의 일부 지방에는 특별히 유력층이 토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2품까지 밖에 올라

가지 못하는 한품의 제약이 있었다. (2008년 서울세무직 9급)

3. 세종 때 도체찰사 박위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는 등 강경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2008년 서울세무직 9급)

4. 세종 때 이루어진 임신약조에 의해 일본과의 무역은 세견선 50척 등 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게 되었다. (2008년 서

울세무직 9급)

5. 조선 전기에 여진족에 대해 토벌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2010년 서울시 9급)

6. 을묘왜변과 같은 왜적들의 소요가 일어나자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2012년 경찰간부후보)

7. 조선 중기에 3포왜란 이후 비변사가 강화되어 청사가 설치되면서 상설기구화되었다. (2008년 서울세무직 9급)



1. ( ◯ ) 표면적으로는 사대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실제로는 매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면

서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자주적 실리 외교였다. 이를 통해 공무역의 형태로 물품이 교류되고 있었고 중국의 앞선 문화의

수입과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문화 외교였다. 

2. ( X ) 한품서용은 양반이 아닌 자의 승진을 제한하는 것으로, 한품서용의 대상자 중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었던 이들은 종2품이 상고관의

서얼 자식이며 정3품 당하관까지였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한품서용을 통해 당상관이 될 수는 없다. 토관은 5품까지 한품으로 서용되었다. 토관(土官) 제도는 변경의 안정을 위해 변경 지역의 토착적인 유력층을 포섭, 효율적인 지방 지배와 군사 조직의 강화를 꾀하고, 밖으로는

이민족과의 연결을 방지하고자 한 회유 정책에서 시행되었다. 15세기 말 토관 제도는 정치·군사적 사명을 다하고 향리로 대체되었다. 

3. ( X ) 박위는 고려 창왕 때에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세종 때에는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토벌하게 하였다. 

4. ( X ) 쓰시마 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세사미두 하사, 매년 50척의 세견선을 인정한 것은 계해약조이다. 조선은 남해안의 부산포, 제포(진

해), 염포(울산)의 3포 개방, 삼포와 서울에 왜관 설치를 허용하고 뒤이어 계해약조(1443)를 체결한 것이다. 그러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삼

포왜란(1510) 등이 일어나자 삼포를 일시 폐쇄하였다. 이후 임신약조(1512)를 통해 제포를 다시 개항하여 무역을 허용하였다. 

5. ( X )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교린) 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나 강경책도 병행하여 태

조 때 두만강 지역을 개척하였고 세종 때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6. ( X ) 1555년 왜인들이 70여 척의 배를 몰고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고, 비변사를

상설기구화하였다. 비변사를 처음 설치한 것은 1510년 삼포왜란 이후이다. 

7. ( X ) 군사 문제 전담 기구인 비변사가 상설기구화된 것은 명종 때 일어났던 을묘왜변으로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면서부터이다. 3포왜란은

비변사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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