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의 신분제도>
№ 073 조선의 신분제도 [№ 045 고려의 신분제도]
1. 고려시대 신분제도 (대가족단위, 평민姓사용, 노비도 이름, 중인등장(4계급) 친족공동체)
2.조선시대 신분제도 (부계중심(17C~),족외혼,조혼,남존여비,재가금지,적서차별)
. 3. 양천제도(15C, 법제적)와 반상제도(16C, 실질적) 1) 양천제도 :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였다. - 양인 :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이다, 조세 국역의 의무를 진다. - 천민 : 비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 성격 : 갑오개혁(1894) 이전까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적인 신분제도이다. - 특징 : 실제로는 양천제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2) 반상제도 :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간의 차별을 두고,민체제(양반ㆍ중인ㆍ상민ㆍ천민)의 신분제도가 점차 정착 3) 신분 이동의 가능 - 상승 : 법적으로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 하락 :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 의의 : 고려사회에 비하여 개방적이다. - 한계성 : 신분사회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4. 조선후기(17 ~ 19세기) - 양반중심 신분제의 동요 → 양반의 향촌지배 약화, 부농층이 성장, 수령중심의 국가 권력 강화, 재지 사족의 영역 약화 1) 양반의 증가 → 군포수입의 감소 → 균역법, 호포법의 실시(=군포의 면제자에게도 군포의 징수) - 공명첩, 납속책 : 합법적, 서얼들이 관직에 나아가는 방법이 되었다. - 양반층의 분화 : 붕당정치와 일당전제화의 전개로 인해 분화됨 • 사족(벌열양반) : 정권에 참여하고 있는 양반 • 몰락양반 ① 향반 : 향촌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였다. ② 잔반 : 양반지주와 이해관계(농민층의 입장 대변)가 다름. 훈장 등 생업에 종사. 동학, 농민봉기의 주동, 사회적·경제적 처지는 일반백성과 거의 다름이 없음. 2) 중간계층의 신분상승 운동 - 서얼 : 정조 때 유득공, 박제가 등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청요직에 진출) - 성공 - 중인 : 서학 등 외래문화의 수용에 선도적 역할(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도전) - 실패→역할 중요성 부각 3) 상민의 감소(조선후기에는 경제가 활성화되었으나 생산직에 종사하는 상민의 수는 감소) 4) 천민의 감소 : 공노비의 해방(순조, 1801) : 일부(대부분) => 노동력 확보와 국가수입증가추진 5) 신분상승과 정치권력의 무관 -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음 - 양반으로서의 특혜는 받음 6) 양반으로 신분 상승하려는 이유 - 군역(군포)의 부담 면제 => 균역법, 호포법의 실시 - 향촌사회에서의 지위 향상 7) 신분과 부는 일치하지 않음 - 부가 있으면 신분상승이 가능 - 신분제의 동요(무신정권때와 공통) : 양반의 증가, 상민과 노비의 감소 - 조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8) 국가에서 임진왜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납속책을 실시하고 공명첩을 발급하였다 - 공명첩: 재정 보충을 위해 부유층에게 돈이나 곡식을 받고 관리의 임명장을 주어 행세만 하도록 함 - 납속책: 군량미나 진휼미가 부족할 때 부농ㆍ거상들로부터 곡식을 헌납 받고 이름뿐인 영직, 허직을 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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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25-3 근세의 신분제와 사회 구조
1. 조선의 신분 제도는 법제상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되었다. (2008년 국가직 7급)
2. 조선 시대에 신분 제도가 엄격하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신분 이동이 불가능하였다. (2008년 국가직 7급)
3. 조선 시대의 양반은 신분적 특권을 누렸으나 군역 등 국역에는 대부분 동원되어야 했다. (2007년 서울시 9급)
4. 조선 시대에는 법적으로 양반만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양민이나 천민은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 (2007
년 서울시 9급)
5. 조선의 양반층은 경제적으로 지주층이고 정치적으로 관료층이었다. (2007년 서울시 9급)
6. 조선의 신분 제도하에서 중인도 신분층으로 점차 정착되어 갔다. (2008년 국가직 7급)
7. 조선의 신분 제도는 관영이나 민영 수공업에 종사하는 수공업자들도 상민에 포함되었다. (2008년 국가직 7급)
8. 조선 시대에 부인과 첩 사이의 엄격한 차별이 있어서, 첩의 자식인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2010년 경북
교행 9급)
9. 조선 전기에 천민의 대부분은 재산으로 취급되던 노비였다. (2007년 법원직 9급)
10. 조선 시대에는 호적에 16세 이상 60세 이하 남성만 기재하였다. (2008년 국가직 7급)
11. 조선 전기에는 동족부락이 만들어져 족보 편찬이 성행하였다. (2012년 지방우정청)
12. 선현의 제사와 교육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서원은 향촌 사림을 결집시키는 기능도 하였다. (2008년 지방직 9급)
13. 사림들은 16~17세기에 유향소를 통해 조세의 부과 및 수세 과정에 관여하며 향리와 농민을 통제하였다. (2010
년 지방직 7급)
14. 16~17세기에 사림들은 향약 조직을 만들어 마을 공동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0년 지방직 7급)
주제 25-3 근세의 신분제와 사회 구조 OX 정답 및 해설
1. ( ◯ ) 양천제에서는 양반, 중인, 상민은 단순히 직역(담당하는 역, 맡은 일)에 의한 구분이며 법적으로 농민이나 양반의 차별이 없었다고
본다. 반상제는 양반이 다른 양인들, 즉 농업, 상업, 수공업 등에 종사하는 양인과도 구분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실제적 신분 제도이
다.
2. ( X ) 조선 시대의 신분제는 고대와 중세에 비해 보다 개방적이었다. 또한, 천민이 공을 세워 속량하고 관직에 오르거나 양반도 모반죄로
노비가 되는 등 신분 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3. ( X ) 조선은 각종 법률과 제도로써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제도화하였다. 양반은 실질적으로 각종 국역을 면제받았으며, 형벌이나 사회적
예우에 있어서 특별대우를 받았고, 외가ㆍ처가ㆍ농장이 있는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4. ( X )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졌다. 즉 법적으로는 양반도 군역의 의무가 있
었으며(5위의 특수병), 농민도 과거를 거쳐 관리가 될 수 있었다.
5. ( ◯ ) 조선 시대의 양반은 경제적으로 중소 지주층이었고, 정치적으로 관료층이었다. 양반이라는 말은 문반과 무반을 합쳐 부르는 것이었
으며, 처음에는 현직 관료를 뜻하다가 나중에는 가문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6. ( ◯ ) 양반 관료를 보좌하거나 기술직에 전념하였던 중인들도 점차 지배층에 속하게 되었다.
7. ( ◯ ) 상민 중 다수는 농민이었고, 수공업자와 상인도 상민에 포함되었다. 수공업자는 일정기간 관수품을 제조하고 장인세를 부담하였으며, 상인(시전상인, 보부상 등)은 국가통제 아래 관수품을 바쳐야 했으며 상인세를 부담하였다. 다만, 수공업자와 상인은 농본억상 정책으로 인
해 농민들보다 천대받았다.
8. ( ◯ ) 양반과 첩의 사이에서 난 서얼은 양반의 자손이면서도 차별 대우를 받아 양반 계층에 들지 못하고, 하급 신분층인 중간 계층으로 편
제되었다. 이들을 ‘중서’라고도 불렀다.
9. ( ◯ ) 조선 시대에 천인의 대부분이었던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며, 매매와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10. ( X ) 호적은 조세와 부역을 부과하기 위해 인구와 가호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호주 밑에 동거하는 식구의 이름과 나이, 직역 등이
남녀별로 기재되었다. 다만, 나이 어린 남녀는 누락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 전기~중기까지는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호주로 등재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1. ( X ) 족보는 가문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안으로 종족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밖으로는 다른 집안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
지고자 하였다. 혼인 상대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족보의 편찬은 조선 중기 이전부터 있었으나 동족 부
락의 형성은 조선 후기의 현상이다.
12. ( ◯ ) 사림들은 그 지역의 유명한 사림을 배향하고, 지방 사림에게 학문을 보급하거나 자제를 교육시킴으로써 학파적 결속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서원은 지방 사림의 공론이 결집하는 장이 되기도 하였다.
13. ( X ) 유향소(향청)는 향촌의 덕망 있는 인사들(재지사족, 사림)로 좌수, 별감 등 책임자를 구성하여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규찰하며 풍
속을 교정하는 등 지방 행정에 참여하였다. 조세 부과 및 부세 수취에 협조하며 향청에 진출한 것은 조선 후기의 부농층이다.
14. ( ◯ )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알맞게 구성한 것이다. 향약에는 양반과 평민
이 의무적으로 가입하였으며, 향약의 간부는 약정(회장), 부약정(부회장), 직월(간사) 등이 있었다.
.
주제 25-4 근대 태동기의 신분제와 사회 구조의 변화
1. 조선 후기에 양천제가 해체되면서 이를 대신해서 정부는 반상제를 법제적 신분제로 규정하였다. (2011년 지방직 7급)
2. 조선 후기에 아전들이 양반들과 맞먹듯이 행동한 것은 양반들의 벼슬길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2008년 국가직 9급)
3. 조선 후기에 몰락한 양반은 전호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2011년 해양경찰)
4. 조선 후기에 각 지역 호적대장에서 가장 크게 늘어난 호구는 양반호이다. (2012년 국가직 9급)
5. 중인은 소청 운동을 통해 신분 상승 운동을 전개하였다. (2012년 지방직 9급)
6. 조선 후기에 첩의 자식들은 법적으로 모든 관직에 나아갈 길이 금지되어 있었다. (2009년 지방직 9급)
7. 서얼들은 18·19세기에 수차례 집단 상소를 하여 허통이 이루어졌다. (2009년 지방직 9급)
8. 조선 영조 때에는 상민호가 줄어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2010년 국가직 7급)
9. 18~19세기에 줄어든 상민호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공노비를 해방시켰다. (2010년 국가직 7급)
10. 조선 후기에는 법으로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을 노비로 정함으로써 노비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2011
년 기상직 9급)
11. 조선 후기에 양반들은 촌락 단위보다는 군현 단위의 동약을 실시하였다. (2012년 경찰정보통신)
12. 향안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각 군현에서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2012년 국가직 9급)
13.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다. (2008년 지방직 9급)
14. 조선 후기에 일어난 향전을 없애기 위해 조정에서는 향리를 없애려 하였다. (2007년 국가직 9급)
15. 조선 후기의 부농층은 종래의 재지사족(在地士族)이 담당하던 정부의 부세 제도에 적극 참여하였다. (2012년 경찰
정보통신)
16. 조선 후기의 사회 모순은 지주와 소작인의 대립, 국가와 농민층의 대립 형태로 나타났다. (2008년 지방직 7급)
17. 실학사상이 대두되었을 때 민중들 사이에서는 미륵사상과 정감록 이 유행하였다. (2010년 지방직 9급)
18. 서학은 17세기 프랑스 신부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2009년 법원직 9급)
19. 조선 후기에는 서울 부근에 거주하는 일부 남인 학자들이 천주교를 수용하였다. (2008년 지방직 7급)
20.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 는 19세기에 한글로 번역되었다. (2011년 사회복지직 9급)
21. 정조 때에는 서학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으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 대탄압이 가해졌다. (2009년 법원직 9급)
22. 홍경래의 난은 지배층의 수탈과 서북민 차별이 봉기 원인이었다. (2012년 법원직 9급)
23. 19세기 농민 봉기의 결과 부세 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2011년 지방직 9급)
24. 임술 농민 봉기 당시 농민들은 소청이나 벽서 등 소극적인 운동과 병행하였다. (2012년 경찰간부후보)
25. 임술 농민 봉기 이후에 부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부의 삼정이정책이 시행되었다. (2012년 경찰간부후보)
주제 25-4 근대 태동기의 신분제와 사회 구조의 변화 OX 정답 및 해설
1. ( X ) 조선 시대 전체를 통틀어 법제적 신분제는 양천제였다. 다만, 16세기 이후 원래 문무 관리를 의미하던 양반이 특권적 신분층으로 굳
어지면서 양반과 중인, 상민, 천민을 구분하는 반상제가 현실적으로 통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 내부에서도 계
층 분화가 일어나고 하층민은 꾸준히 신분상승노력을 전개해갔다.
2. ( ◯ ) 조선 후기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관직에 진출할 길이 막힌 향촌사회의 사족들은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나, 생계에
종사할 정도로 몰락한 잔반으로 분화되었다. 반면 부농층이 등장하여 수령과 결탁해 향임직에 진출하였고, 수령권이 강화되면서 수령을 보
좌하는 아전의 위세가 강해졌다.
3. ( ◯ ) 조선 후기에 재산이 없어 몰락한 양반들 중 일부는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전호로 전락하였다.
4. ( ◯ ) 조선 후기에는 공명첩, 납속, 매관매직, 족보의 매입, 위조 같은 방법으로 양반으로 신분을 상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구호적을
예로 들어보면 17세기에 10%에 못 미쳤던 양반호가 19세기 중엽에는 70%에 이를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다만, 이 양반의 분류는 직
역이 유학(幼學)이라고 표시된 호를 포함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양반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상민층이 전개
한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 노력이 광범위한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5. ( ◯ ) 서얼의 청요직 진출 허용으로 자극받은 기술직 중인들은 신분 상승을 주장하는 소청운동을 벌였다.
6. ( X ) 서얼은 조선 초기부터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으나 무과나 잡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다만, 한품서용에 의해 승진에 제한
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서얼들은 납속책과 공명첩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허통 운동을 통해 청요직 진출이 허용되어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다.
7. ( ◯ ) 서얼은 한품서용에 의해 하급 실무 관직만을 맡을 수 있었는데, 수차례 집단 상소 끝에 정조 때 허통이 이루어져 규장각 검서관 등
청요직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8. ( ◯ ) 조선 후기 상민호의 감소는 조세 부담을 피한 양반으로의 신분상승 때문이었다. 균역법은 양민의 수취 부담을 줄이는 제도였다.
9. ( ◯ ) 조선 후기에 수취 부담을 질 상민호가 크게 줄어들자 조선 정부는 공노비를 해방시켜 상민호를 보충하였다.
10. ( X )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일 때 자식을 노비로 삼는 제도는 일천즉천법이다. 이 제도는 고려 이후 조선 시대에 유지된 노비 신분에 관한
규정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영조 때 양인 증가를 위해 천남양녀혼(어머니가 양인)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는 종모종량법을 실시하였다.
11. ( X ) 동약은 양반이 중심이 된 향촌 조직이었다. 조선 후기에 양반들은 향촌에서 영향력이 줄어들어 군현 단위보다 촌락 단위로 동약을
실시하였다.
12. ( ◯ ) 향안은 지방 사족층의 명부로, 부계 조상과 처가 일족에 신분적 결격 사유가 없어야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자는 향원이 되어 향회를 구성하고 운영하였다. 임진왜란(1592)을 전후하여 17세기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작성되었으며, 18세기 이후에는
부농층의 진출로 향안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졌다.
13. ( ◯ ) 향안은 향촌 사회의 지배층인 지방 사족의 명단으로,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각 군현마다 보편적으로 작성되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은 그들의 총회인 향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향회의 운영 규칙이 향규(鄕規)였다.
14. ( X ) 향전은 기존 향촌 세력인 구향(사족, 유림)과 새롭게 등장한 신향 사이에 향권을 두고 일어난 다툼을 말한다. 이에 대해 수령들은
신향층을 옹호해 사족의 영향력을 약화하려 하였다.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향리의 역할은 오히려 커졌다.
15. ( ◯ ) 원래 재지사족층은 유향소, 향청, 향약 등을 통해 자치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수령의 조세 수취 등에 자문 역할을 하거나 향리를 감
시하며 지방 행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부농층이 정부의 부세 수취에 적극 협조하면서 관권과 결탁하여
향회에 진출하는 등 신분적 성장을 이루었다.
16. ( ◯ ) 지주와 소작인 소작 관계에서 대립이 일어나 소작인들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항조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국가와 농민층은
조세 수취와 관련해 대립하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 모순은 임술 농민 봉기 같은 전국적 농민 봉기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17. ( ◯ ) 실학사상은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대두되었다. 삼정의 문란과 재난 · 질병의 발생으로 민심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미륵사상과 정감록 등의 예언서가 유행하였다.
18. ( X ) 서학이 전파된 것은 17세기로 초기에는 학문적 입장에서 받아들였고, 중국으로 건너간 사신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서학은 신앙으로 믿어지게 되었다.
19. ( ◯ ) 18세기 후반 남인들은 신앙으로서 천주교(서학)를 수용하였다.
20. ( X )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한글로 번역된 것은 18세기로, 이 시기에 서학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21. ( ◯ ) 정조 때 중용된 남인과 노론 시파는 천주교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남인과 시파를 숙청하기
위한 빌미로 신유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22. ( ◯ ) 조선 후기 서북 지역은 일찍부터 상공업이 발전하였으나, 서북 지방민에 대한 차별로 관직에 진출이 어렵고 토착 세력이 형성되지
못하여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특히 많은 수탈을 당하였다. 이에 19세기 초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23. ( X ) 홍경래의 난과 임술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삼정의 문란이 구체적으로 드러났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24. ( ◯ )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날 당시는 삼정의 문란으로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 농민들은 적극적인 농민 봉기와 함
께 소청이나 벽서 같은 소극적인 운동도 함께하였다. 소청은 관가에 자신들의 문제를 호소하는 것이고, 벽서는 익명의 벽보를 붙여 자신들
의 문제를 알리는 것이었다.
25. ( X ) 임술 농민 봉기 이후에 부세 문제 해결을 위한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지만, 구체적인 해결책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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