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을미개혁 >
№ 122ㆍ123. 동학의 추이와 성격 ㆍ 12개조 폐정개혁안
삼례집회(1892) | 삼례에 모여 1차 교조신원운동(최초의 집회), 탄압의 금지는 약속 받았으나 실패 | ||
복합상소(1893) | 40여명이 한성에 모여 2차 교조신원운동 → 교조신원 상소, 외국인철수 요구 → 실패 | ||
보은집회(1893) | 약 2만여 명이 보은에 모여 3차 집회, 탐관오리 처단과 제폭구민ㆍ반봉건ㆍ반외세ㆍ 척왜양창의 주장 → 정치적 색체 → 정부가 회유책과 강경책으로 진압 → 호우와 식량의 부족으로 자진 해산 | ||
고부민란(1894) | 정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 축출ㆍ만석보 파괴(1.16), 10여일 만에 해산 | 1기 | 1차 봉기 (남접) 정치적 반봉건 사회개혁운동 |
백산봉기 | 무장조직화, 창의문, 사발통문 | ||
황토현 전투 | 절정기, 전주 감영군(지방군)을 격파 (4.7) | 2기 | |
장성 황룡싸움 | 관군(홍계훈)을 격파하고 전주성 점령, 장태사용 (4.27) | ||
전주화약 | 청군(5.5)ㆍ일군(5.9)이 개입하자 정부가 휴전을 제의해 전주화약 성립 (5.8) | 3기 | |
집강소 설치 | 총본부인 대도소를 중심으로 전라도 군현 단위에 집강소가 설치 폐정개혁 12조의 추진 | ||
교정청 설치 | 온건개화파가 왕명으로 설치 (6.11) | ||
궁궐 침입 | 일본이 무력으로 경복궁 점령 (6.21) | ||
청ㆍ일 전쟁 | 텐진 조약이 배경(6.23) →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1895.3) | ||
1차 갑오개혁 | 군국기무처 설치(6.25) | ||
공주우금치전투 | 항일구국운동,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남접(정치)+북접(종교) → 대패 | 4기 | 2차 봉기 |
2차 갑오개혁 | 홍범14조(12) |
농민국의 폐정개혁 12개조 | ||
1. 동학도은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 ⇒ 정부는 동학을 심하게 탄압하여 왔다 | |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 ⇒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였다 | |
3. 횡포와 부호를 엄징한다 | ⇒ 봉건지배층에 대한 타파의지 | |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 ||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 ⇒ 신분제 타파의지 | 갑오개혁때 그대로 반 영 |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의 평량갓을 없앤다. | ⇒ 백정,기생,노비,승려,무당,판수,광대 | |
7.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 ⇒ 봉건적 폐습폐지 주장 | |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 ⇒ 세금징수의 폐단 | |
9.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 ⇒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 |
10.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은 무효로 한다. | ⇒ 많은 농가들이 부채를 지고 있었다 | |
11.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 ⇒ 일제의 침탈에 대한 항일감정 있었다 | |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 ⇒ 정부가 들어주기 가장 어려운 조건 |
1. 교조신원운동: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을 공인받고자 하는 합법적 운동
1) 삼례집회(1차, 1892): 최초의 집회, 탄압의 금지는 약속 받았으나 교조의 신원은 실패함.
2) 복합상소(2차, 1893): 4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광화문에서 교조시원을 상소 → 실패
2. 정치운동
1) 보은집회(3차, 1893) : 최초의 정치적 집회, 탐관오리 처단과 일본과 서양세력의 축출. 정부가
회유책과 강경책으로 진압 하였으며, 호우와 식량의 부족으로 자진 해산함.
2) 금구집회(1893): 전봉준, 서장옥 등 남접이 개최한 집회.‘보국안민’,‘척왜양창의’
3. 동학농민운동 전개: 농민봉기(민란)에서 항일운동으로 발전, 종교운동보다 사회운동의 성격이 강함
1) 제1기(고부민란): 정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축출, 만석보의 파괴, 10여일 만에 해산
2) 제2기(제1차 농민전쟁, 1894.3~4): 동학 농민 운동의 절정기(남접중심)
- 균전사(개간사업을 위해 파견한 관리)의 혁파
-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었던 시기 : 반봉건, 반외세적 창의문과 격문, 4대 강령 발표
-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1894.4.7) →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격파(4.23), 전주성 점령(4.27)
- 지휘군은 대개 동학인들이 맡았으나 참여자는 일반농민들이었다.
3) 제3기: 전주 화약(1894.5.8)과 집강소 설치(1894.6) ⇒ 폐정개혁안의 실천기
- 정부가 농민군을 진압할 능력이 없어 청에 파병요청, 청군 파병결정(1894.4.29): 아산만에 상륙(5.5)
- 텐진조약을 구실로 일본군이 조선에 군대 파견(1894.5.6/5.9): 인천에 상륙
-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받고,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여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음(1894. 5. 8)
- 집강소 설치: 총본부인 대도소를 중심으로 전라도 군현 단위에 집강소가 설치됨
• 동학의 민정기관, 농민자치 기구(*군사적 기능, 군사훈련은 담당하지 않음)
• 나주ㆍ남원을 제외한 전라도 52개군에 설치 = 전라도 등에 설치(충청도, 경상도 일대에도 설치)
• 폐정개혁 12조의 추진
4) 청·일 전쟁 발생(1894.6.23)
-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 거부
- 조선 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에야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교정청을 설치
-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 점령(1894. 6.21) → 갑오개혁의 발생(음1894. 6.25)
- 선전포고 없이 청군을 공격 → 청일전쟁을 일으킴 → 청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냄(1894. 9.26)
-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1895), 조선의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 → 청은 조선의 문제에 관여하지 못함
- 강화도조약, 갑오개혁과 함께 청의 종주권부인
5) 제4기 - 제2차 농민 전쟁(1894.10.21):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남접과 북접의 연합
- 원인(정부의 폐정 개혁안 불이행, 일본의 경복궁 점거 → 청일전쟁 승리후 내정간섭 강화)
- 전개: 남접(전봉준)과 북접(손병희)의 연합 부대를 형성
- 결과: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배(11.11) → 농민군(김개남)의 청주성 함락 실패 →
양반ㆍ부호ㆍ관료ㆍ이서층으로 조직된 민보군에 의해 철저하게 괴멸
4. 성격과 영향 * 동학은 청의 군대에게 탄압을 받지 않았다.
1) 반봉건적: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였으나 성리학적 질서의 붕괴에는 기여
2) 반외세적, 민중적, 민족적 *조선왕조는 부정X
3) 잔여 세력이 영학당을 결성하고, 을미의병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
4) 전통적 민족적 신앙을 바탕으로 유교·불교·도교 물론 천주교의 교리까지 일부 흡수한 종합적 성격
5) 농민층의 의식성장과 조직력을 갖춘 정치적 지도층의 출현으로 민란의 국지성ㆍ분산성이 극복
5. 한계성
1) 근대적 사회의식으로 직결되지 못함 = 국가조직, 국가재정, 상공업, 과학기술 등은 없음
2) 지지 기반의 미약: 농민층 이외의 지지기반을 확보치 못하여 당시 집권 세력과 개화 세력이 모두 외면
남접(전봉준) | ① 전라도 ② 강경한 정책투쟁의 선호 |
북접(최시형, 손병희) | ① 충청도 ② 종교운동의 성격 ③ 최시형: 전봉준을 사문의 도적놈이라 비판 |
보국안민 창의문 (백산창의문): 반봉건적, 반외세적 |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중에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자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 무리를 쫒아 내몰고자 함이다... - 전봉준, 1894 - |
* 동학(1860, 경주, 최제우→최시형)[동경대전-한자]<포덕문,논학문,수덕문,불연기연> [용담유사-한글]<용담가,안심가,교훈가,권학가,도덕가,흥비가> ☞철학(주기론),종교(샤머니즘, 도교), 사상(인내천, 天人合一) ⇒ 외세배척, 양반사회부정 |
* 동학농민군의 4대 행동강령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②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라(보국안민) ③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반외세적) ④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반봉건적) |
* 전봉준 장군의 공초 “고부에서 기포한”, “고부민란 때 동학이 많았는가. 원민이 많았는가.”, “원통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민간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공포 함이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
№ 124.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1.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정부에서 자주적 개혁추진을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갑오개혁을 추진
2. 갑오개혁(1894) 1) 1차 갑오개혁(음1894.6.25) : 김홍집 내각, 친일내각 -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킴 - 군국기무처의 설치 :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초법적 기구 2) 2차 갑오개혁(음1894.11.21) : 김홍집 내각, 더 친일내각 -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 더욱 본격화됨 - 흥선 대원군 퇴진 / 군국기무처의 “폐지” /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구성 - 홍범 14조의 반포 : 최초의 헌법적 성격, 고종이 공식 발표
3) 성과 : 내각의 권한 강화 = 입헌군주제의 추진(성공하지는 못함) 4) 한계 : 군사면에서의 개혁이나 농민들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
3. 을미개혁(음1895. 8.24 ~ 양1896. 2.11) *삼국간섭→을미사변→을미개혁→을미의병→아관파천 1) 삼국간섭(1895. 4):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차지한 대련(요동 반도)을 러시아, 프랑스, 독 일이 개입하여 청에 반환하도록 요구 → 일본의 대련 반환 : 일본세력 후퇴, 조선에 친러 세력 등장 2) 제3차 김홍집 내각: 친러내각,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제휴하여 박영효를 축출. 이범진, 이완용 등용 3) 을미사변(음1895.8.20): 명성왕후를 일본 침략자들이 시해 - 결과 : 항일의병의 전개(을미의병), 김구의 치하포사건(1896) 4) 제4차 김홍집 내각(친일): 김홍집, 유길준 등의 친일 세력 중심 5) 춘생문사건(음1895.10.12): 고종이 친위대를 이용하여 피신하려다 실패. 친러, 친미파의 붕괴 6) 을미의병(1896.1) 7) 아관파천(1896.2.11):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완용, 이범진 등의 친러파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 친러 정권의 수립
4. 갑오개혁·을미개혁의 성격과 한계성 1) 자율적: 개화인사와 농민층의 개혁요구가 일부 반영, 신분제도의 폐지,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를 금납화, 외국어 학교 관제를 반포하고 한성 사범학교를 설립. 2) 타율적: 화폐제도 개혁 등 일본의 침략의지가 반영 3) 한계성: 군사제도 개혁이나 농민이 요구한 토지제도 개혁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 126. 아관파천과 열강의 이권침탈
1. 국제관계 흐름 청ㆍ일 전쟁(1894) → 마관조약(1895.3.23) → 삼국간섭(1895,3.29 러ㆍ프ㆍ독) → 을미사변(1895.8) → 춘생문사건(1895) → 을미개혁→ 을미의병 → 아관파천(1896, 친러내각수립) → 열강의 이권침탈 (최혜국조관 근거) → 독립협회(1896~1898, 이권침탈저지) → 대한제국(광무개혁) 2. 러•일간의 세력 균형 협상 [ 베로니 ] 베베르ㆍ소촌각서(러>일) → 로마노프ㆍ산현의정서(러=일) → 니시ㆍ로젠협정(러<일) 3.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 아관 파천을 계기로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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