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관파천, 독립협회, 대한제국>
№ 126. 아관파천과 열강의 이권침탈
1. 국제관계 흐름 청ㆍ일 전쟁(1894) → 마관조약(1895.3.23) → 삼국간섭(1895,3.29 러ㆍ프ㆍ독) → 을미사변(1895.8) → 춘생문사건(1895) → 을미개혁→ 을미의병 → 아관파천(1896, 친러내각수립) → 열강의 이권침탈(최혜국조관 근거) → 독립협회(1896~1898, 이권침탈저지) → 대한제국(광무개혁) 2. 러•일간의 세력 균형 협상 [ 베로니 ] 베베르ㆍ소촌각서(러>일) → 로마노프ㆍ산현의정서(러=일) → 니시ㆍ로젠협정(러<일) 3.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 아관 파천을 계기로 본격화
|
№ 127. 독립협회(1896.7.2 ~ 1899) (독립협회와 1년겹침)
1. 배경 1)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짐 2) 열강의 이권침탈 격화: 철도부설권(=교통·통신시설 부설권), 광산ㆍ산림채벌권 3) 러·일 협정의 체결: 베베르·고무라 각서, 로마노프·야마가타 협정, 로젠·니시 협정
2. 독립협회의 창설 1) 서재필, 윤치호 등은 독립신문을 간행(1896.4)하고 독립협회를 창립(1896.7) 2) 공식기관지[대조선독립협회회보]발간, 정부의 지원으로 비공식기관지[독립신문] 간행 3) 구성(관료중심→민중중심): 서재필(급진개화파), 이상재ㆍ윤치호(온건개화파), 남궁억ㆍ정교(진보적 유학자)
3. 독립협회의 활동
4. 독립협회의 해산(1899) 1) 원인: 입헌 군주제를 추구로 보수 관료 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함 → 보수세력은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추구한다고 모함하여, 결국 보수 세력에 의해 개혁적 박정양 내각이 붕괴 →대한제국에 의해 독립협회도 정식으로 해산. 수구파 내각 성립 2) 대한제국의 탄압과 독립협회의 해산: 황국 협회(보부상)와 군대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킴→ 3년 만에 완전히 해산됨(1899.3). (*cf. 황국중앙총상회: 시전상인 조합)
5. 독립 협회의 의의와 한계 1) 의의: 민중을 바탕으로 국권 수호와 민권 신장에 기여한 자주적 근대화 운동, 민중의 참정권을 강조 민중을 기반으로 한 운동이지만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지방의 유생과 농민층,보부상같은 소상인의 지지를 얻지 못함 2) 한계: 외세 배척 운동이 주로 러시아ㆍ프랑스ㆍ독일을 대상 ⇔ 친일ㆍ친미ㆍ친영적 성향이 매우 강함 군대란 외국침입을 막기위한 것이 아닌 동학이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여 자주국방에 대한 중요의식이 결여, 의병ㆍ동학을 비난, 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 3) 협회의 근대화사상은 이후 대한제국 말기의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 애국계몽사상으로 계승
|
.
№ 128. 대한 제국과 광무개혁
1. 대한제국 성립 1)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 (※ 경복궁 X) 2) 환구단(원구단)에서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라 칭하여 자주국가임을 선포 →교전소(황제직속입법기구)와 사례소를 설치하여 개혁 작업에 착수
2. 광무개혁의 추진 1) 성격: 구본신참 = 정치는 복고적, 경제는 근대적 (광무개혁은 동도서기, 중체서용과 같은 맥락) 민국건설(국민의 기본권보장이 아니라, 영ㆍ정조 이후 성숙되어온 소민 위주의 국가 건설) 2) 교전소의 설치(1897.3): 신구 법제의 절충과 새 법제 및 칙령의 제정을 위해 중추원 내부기구로 설치. ⑴ 구성: 보수파 각료(김병시,조병세,이완용) + 외국인 고문(그레이트 하우스) + 독립협회 인사(서재필,이상재) ⑵ 보수파와 개화파 간의 갈등 격화 → 독립협회 해산 후 황제 직속 입법기구로서 법전교정소(교정소)로 전환 3) 주요내용
3. 광무개혁의 한계 ⑴ 복고적 개혁으로서 전제군주제의 강화 등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면이 있었다 ⑵ 독립협회 등 진보적 개혁운동을 탄압하였다. ⑶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국민적 결속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⑷ 위정척사파는 복고적 전제군주 강화를 목표로 한 광무개력을 지지O |
https://www.youtube.com/watch?v=Sh0gmvVgHBs&list=PLTueiRDhYZ6LZZIdt4GT6OtymLB77GKaE&index=27
125. 근대개혁안 비교
|
.
주제 33 개혁의 추진과 구국 민족 운동의 전개
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날 당시에 조선은 친위대와 진위대를 신설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2007년 국가직 9급)
2. 동학 농민군은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락하는 등 반봉건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2009년 지방직 7급)
3.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의 공통적인 개혁안은 과부가 된 여성의 개가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2011년 국가직 9급)
4.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사이에 농민의 요구를 반영한 개혁을 시도하려는 교정청 관리들을 볼 수 있다. (2011년 법원직 9급)
5. 갑오개혁으로 왕실과 일반 행정이 제도적으로 분리되게 되었다. (2008년 선관위 9급)
6. 갑오개혁을 추진한 세력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2010년 법원직 9급)
7. 갑오개혁으로 금본위제를 시행하였다. (2012년 지방우정청)
8. 갑오개혁으로 공노비가 해방되고 노비 세습제가 철폐되었다. (2008년 선관위 9급)
9. 제2차 갑오개혁으로 전국을 23부로 재편하였다. (2012년 법원서기보)
10. 2차 갑오개혁 때 과거 제도를 폐지하였다. (2012년 법원서기보)
11. 2차 갑오개혁으로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시켰다. (2012년 법원직 9급)
12. 대한제국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복궁으로 환궁함과 함께 국내외에 독립을 선포하면서 등장하였다.(2006년 국가직 7급)
13. 광무개혁에서는 황제의 군사권을 강화하고자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2013년 지방직 9급)
14. 대한제국의 양전 사업과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은 모두 재정 확보에 기여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문항 일부 수정
15.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통해 광무학교, 상공학교 등 각종 기술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2007년 서울시 9급)
16. 대한제국은 러·일 전쟁으로 인하여 지권 발급을 중단하였다. (2009년 국가직 7급)
17. 대한제국은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를 대폭 증강하였다. (2009년 국가직 9급)
18. 대한제국은 청나라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중국 연호를 폐지하였다. (2011년 서울시 9급)
19. 독립협회는 헌의 6조를 결의하고 국왕에게 건의하였다. (2012년 법원직 9급)
20. 독립협회는 유교 문화를 수호하고, 서양과 일본 문화를 배척하였다. (2010년 지방직 9급)
21. 독립협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거부 운동을 벌였다. (2012년 법원직 9급)
22. 독립협회는 궁극적으로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갖는 공화제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2012 일반순경)
23. 을미사변을 계기로 개혁을 단행하여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2010년 국가직 7급)
24. 삼국 간섭 이후 김홍집 내각이 출범하여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2009년 지방직 9급)
25. 을미의병은 유생이 주도하였다. (2009년 서울시 9급)
26. 을사의병은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한 것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2009년 법원직 9급)
27. 을사의병은 해산된 군인이 주도한 의병 항쟁이었다. (2010년 법원직 9급)
28. 을사의병은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2010년 법원직 9급)
29. 정미의병은 전 계층이 참여한 전국적인 항일 구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30. 보안회는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며 영토 강탈의 의도를 드러내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2010년 지방직 7급)
31.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비밀조직이었다. (2011년 지방직 7급)
32. 신민회는 자기회사·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민족 산업 육성에 노력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33. 신민회는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34. 신민회는 이회영 형제의 헌신으로 남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2013년 9급 법원직)
35. 신민회는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으로 해산되었다. (2011년 서울시 9급)
36. 신민회는 원산 노동자의 총파업과 단천의 농민 운동 그리고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지원하였다. (2010년 경찰)
37.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관리사로 간도에 파견하여 이 지역의 우리 주민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2011년 기상직 9급)
38. 1909년 일제는 청과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남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2010년 국가직 9급)
39. 조선 숙종 때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2010년 국가직 7급)
40. 일본은 청·일 전쟁 중에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하였다. (2009년 국가직 9급)
주제 33 개혁의 추진과 구국 민족 운동의 전개 OX 정답 및 해설
1. ( X ) 친위대와 진위대를 신설하여 군사력을 증강한 것은 1895년 을미개혁 때이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에 일어났다.
2. ( ? ) 칠반천인이란 노비, 광대, 무당, 승려, 기생, 판수, 백정 등 천대받던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들에 대한 대우개선은 신분 제도 폐지를의미한다. 또한, 청춘과부의 재가 허락을 통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반봉건적인 인식을 보여 준다.
3. ( ? )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에도 청춘과부의 재가 허용이라는 부분이 있고, 1차 갑오개혁에서는 사회 개혁의 하나로, 조혼 금지와 과부의 재가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4. ( ? )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받아들여 자주적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1894년 6월에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이후 교정청대신 군국기무처가 개혁 작업을 진행하였다.
5. ( ? ) 1차 갑오개혁 때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가 분리되었고, 재정도 왕실과 정부 재정이 구분되었다.
6. ( X ) 경복궁을 중건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킨 사람은 흥선 대원군이다.
7. ( X ) 1차 갑오개혁 때 조세의 금납화와 은본위제 화폐 제도 실시를 명시하였다.
8. ( X ) 공노비 해방은 갑오개혁 이전인 1801년 순조 때, 노비 세습제는 1886년 고종 때 이미 이루어졌다. 1차 갑오개혁으로 양반 중심의 신분제 폐지로 법적으로는 근대적 평등 사회가 이룩되었다. 양반과 평민의 계급타파 및 노비와 천민의 해방을 비롯하여 조혼금지, 과부 개가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등 봉건적 폐습을 타파하였다.
9. ( ? ) 총리대신 김홍집, 외무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 학무대신 박정양 등이 중심이 된 2차 갑오개혁 때 지방 행정 조직을 8도에서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다.
10. ( X ) 1차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려는 원칙을 세웠다.
11. ( X )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이 담당하게 하여 재정의 일원화를 추진한 것은 1차 갑오개혁 때이다.
12. ( X )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13. ( ○ ) 대한제국은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제에게 군대 통수권 및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을 부여하였으며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의군사권을 강화하였다. 원수부는 황제 직속의 군통수 기관으로 황제가 대원수를 맡았다.
14. ( ○ ) 1898년 대한제국 정부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양전 사업을 통해토지 대장인 양안을 작성하였고 토지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지계를 발급하였으며, 조세의 수입원을 확실히 정할 수있었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 또한 근대적 소유권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실시하였으며 토지 조사 사업으로 식민 지배의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15. ( ? ) 각종 실업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여러 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기술 발전을 꾀하였다.
16. ( ? )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사실상 전국이 일본군의 관할에 들어가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양전 지계 사업이일본의 이해와 상충하면서 양전 지계 사업은 중단되었다.
17. ( ? ) 대한제국은 황제가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였고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를 장악하였으며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8. ( X ) 청의 연호가 폐지된 것은 갑오개혁 때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부터이다.
19. ( ? )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킨 관민 공동회를 열고,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국정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20. ( X ) 유교 문화를 수호하고, 서양과 일본 문화를 배척한 것은 위정척사 운동이었고, 독립협회는 일본과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인사들이많았으며, 서양의 제도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21. ( X ) 독립협회가 이권 수호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지만,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거부 운동은 1904년 보안회가 전개한 것이다.
22. ( X ) 독립협회는 왕의 존재를 인정하되, 통치는 법에 의거해야 한다는 입헌 군주제를 추구하였다. 공화제를 주장한 단체는 신민회이다.
23. ( ? ) 일제는 삼국간섭으로 약화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하여 반일적 입장을 취하던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을미사변, 1895). 이후 성립된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간섭 아래 을미개혁을 추진하여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24. ( X ) 홍범 14조가 발표된 제2차 갑오개혁은 청 · 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았지만,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이던 1894년 12월에 시행되었다.
25. ( ? ) 을미의병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으며,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26. ( ? )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저항하여 의병 운동뿐만 아니라 을사오적 처단 시도, 자결, 항일 언론 활동 등으로 저항이 일어났다.
27. ( X ) 을사의병은 을미의병 이래의 의병 잔류 세력과 일부 평민 의병장이 주도한 의병 항쟁이었다. 해산된 군인이 주도한 의병 항쟁은 정미의병이었다.
28. ( X ) 남한 대토벌은 1907년에 일어난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일제가 벌인 대대적인 의병 토벌 작전이다.
29. ( ○ ) 정미의병은 사회 각계각층(전직 관리 · 유생 · 군인· 농민 · 포수 등)이 참여하여 전국적인 항일 구국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30. ( ? ) 보안회는 보국안민을 뜻하며,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였다. 결국, 일본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였으나 보안회에 탄압을 가하여 해산시켰다. 같은 시기에 조선인에 의한 자주적 개발을 위해 농광회사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31. ( ? ) 신민회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비밀결사로 활동하였다.
32. ( ○ ) 신민회는 민족 산업 육성을 위해 태극서관(대구)과 자기회사(평양) 등을 설립하였다.
33. ( ○ ) 신민회는 민족 교육을 위해 오산학교(정주), 대성학교(평양), 보창학교(강화) 등을 설립하였다.
34. ( ○ ) 신민회는 이회영 형제의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남만주로 이주하여 경학사를 설립하고 부설 기관으로 신흥 강습소를 설립하였다.
35. ( X ) 고종 퇴위 반대 운동으로 해산된 단체는 대한 자강회이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 활동하였는데 일제는 1911년 조선 총독 암살을 기도했다며 안악 사건을 조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동휘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검거되었다. 이후 신민회는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다.
36. ( X ) 신간회(1927~1931)의 활동이다.
37. ( ? )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간도 시찰사로 파견(1902)하였다가 이듬해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였다. 이범윤에게 간도 지역 한인 보호에 힘쓰며 이곳을 함경도에 편입시켜 관리하게 하였다.
38. ( ? ) 일제는 1909년 청과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남만주 철도의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39. ( ? ) 안용복은 조선조 숙종 때 일본에까지 찾아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받았다.
40. ( X ) 일제는 러·일 전쟁 도발 후에 군사적으로 한국을 점령하고, 시마네 현(縣)의 고시(告示)에 의하여 독도를 일방적으로 그들의 영토로편입하였다(1905. 2.).
'한국사 > 1 근현대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제 문화정책, 식민사관> (0) | 2017.04.19 |
---|---|
<-- 국권침탈 과정> (0) | 2017.04.19 |
<근현대 외국인, 역사왜곡 (동북공정, 독도)> (0) | 2017.04.19 |
<물산장려운동><경제적 구국운동> (0) | 2017.04.19 |
<-- 교통, 통신, 구호시설// 근대 교육, 역사, 신문> (0) | 2017.04.19 |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을미개혁 > (0) | 2017.04.19 |
<임오군란, 경제침투, 갑신정변> (0) | 2017.04.19 |
<강화도조약, 미국과의 조약> (0) | 2017.04.19 |
<흥선대원군, 위정척사운동, 개화사상> (0) | 2017.04.19 |
<근대사의 흐름> (0) | 2017.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