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급 서울시 한국사 문제 정답 및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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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0. 14:14 한국사/00 기출 정답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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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서울시 9급 한국사 해설 원유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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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려의 대외 교섭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남송은 연려제금책(聯麗制金策)을 수립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의 분쟁에 고려가 개입하기를 희망했다.

② 광종은 후주의 사신이 온 것을 계기로 백관의 의관을 독자적인 제도로 고치는 등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③ 고려의 외교교섭은 외왕내제(外王內帝)였다.

④ 원효의 기신론소는 금나라에 반포되었다.

⑤ 고려와 일본의 물자교류가 활발했던 것은 현종 때였다.

정답. ③ 고려의 대외정책은 외부적으로 왕을 칭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황제국의 체제를 지향했다. 이는 <고려사>의 내용에 남아 있는 칭호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른바 ‘술이부작’과 ‘유교적명분’ 속에서 갈등을 많이 했는데, 결국은 ‘술이부작’의 정신을 지켜 제후국으로서는 써서는 안되는 용어이지만, 당대의 기록을 살린다는 관점에서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이처럼 <고려사>를 통해서도 고려가 대내적으로 황제국의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다행한 일이다. 사실은 고려가 이런 용어를 사용했는지 모를뻔했다).

※ 이러한 외왕내제의 특징은 발해에서도 나타났다.

<②번의 문제점>(박용운 <고려시대사> pp61-62참조)

광종대 정책은 거의 쌍기일행의 정책이라 보면 된다. 광종이 쌍기 일행이 고려를 방문했을 때 후주의 황제에게 건의해 이들을 잔류토록 한다. 그 후 벌어지는 광종의 개혁정책은 모두 쌍기가 주도하여 시행한다. 노비안검법이 그렇고, 과거제도가 그렇고, 공복제도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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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다음 제시된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하루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 10여 인과 약속하였다.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같은 모임을 맺자. 항상 선을 읽히고 지혜를 고르는 데 힘쓰고, 예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힘들어 일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바 임무에 따라 경영한다. 인연에 따라 성품을 수양하고 평생을 호방하게 고귀한 이들의 드높은 행동을 좇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① 아미타를 전도해 불교의 대중화를

② 철저한 수행을 선도해 교·선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다.

③ 흥왕사를 근거해 화엄종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④ 유불일치설과 심성의 도야를 강조했다.

⑤ 법화 신앙을 중점으로 백련 결사를 제창했다.

정답. ② 지눌에 대한 설명이다. 일단 찾아낸 지문상으로는 2번이 가장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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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다음 중 고려 후기 정국에 대한 동향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정치기구는 첨의부-4사 체제로 개편되었다.

② 충렬왕과 충선왕의 계승은 원나라 무종의 옹립과 관련이 있다.

③ 원의 기황후 세력이 충혜왕 정권을 위협했다.

④ 공민왕 12년, 흥왕사의 변을 계기로 외척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⑤ 충목왕 때 정치도감에서 활동한 정치관은 대체로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정답. ④ 김용의 ‘흥왕사의 변’ 이후 공민왕은 ‘세상을 떠나 초연한 사람’(離世獨立之人)을 얻어 개혁정치를 해나가고자 한다. 이가 바로 신돈이다. 그리고 이의 개혁을 도와주기 위해 키워나가려 한 세력이 바로 성균관을 통한 신진사대부들의 진출이다.

-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간의 대립 : 이는 국내 세력의 갈등뿐 아니라, 원나라의 국내정치에의 간섭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본의든 아니든 이 둘 간의 대립은 원나라 황위계승분쟁에 충선왕이 지지한 무종이 승리를 거두면서 자연히 종식되었다.

- 충혜왕 : 충혜왕이 즉위하면서 편민조례추변도감 등 벌여나간 개혁정치는 기철을 비롯한 친원적 인물들의 깊은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원이 적극 개입하여 충혜왕을 붙들어다가 멀리 유배 보내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충혜왕은 이 도중에 사망하였다.

<⑤번의 문제점>

당대 명문인 세족출신과 신진사류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예를 들면 당대명문인 안동권씨(권재(왕후(충선왕이 아들로 삼아 왕씨);→충목왕대 개혁을 주도한 사람), 명문 안동김씨(김영돈), 광산김씨(김광철) 등과 순흥안씨(안축, 안향; 둘 다 향리 출신으로 입신한 인물) 등 신진사류가 있었다.

※ 다만, 민현구교수님의 “백문보 연구”(신진사류 연구)를 통해서 보면 이때의 개혁세력 33인의 대부분이 사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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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왕명에 따라 신숙주 등이 국가 왕실의 행사에 대한 의식의 절차를 규범화해 편찬한 것으로 옳은 것은?


① 국조보감 ② 사성통고 ③ 국조오례의 ④ 내각일력 ⑤ 해동제국기

정답. ③ <국조오례의>는 길·가·빈·흉·군례 등 다섯가지의 국가의 의례를 정한 것으로, 세종의 명으로 시작되어 성종대 신숙주·정척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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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음 중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명나라와 태종 이후로 관계가 좋아져 교류가 활발했다.

② 세종 때 4군 6진이 설치되어 오늘과 같은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③ 여진족에 대해 토벌 위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④ 화약 무기를 개발하여 선박에 장착 하는 등 왜구 격퇴에 노력을 기울였다.

⑤ 류큐에 불경, 유교경전, 범종 등을 전해주어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정답. ③ 조선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을 표방하였으며, 그 중에 교린대상국인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화전양면책[강온양면책]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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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역사의 의미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과거였던 사실(사실로서의 역사),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기록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② 사실로서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현재까지 일어난 모든 과거의 사건을 말한다.

③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연구해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④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역사사가 선정하고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⑤ 사실로서의 역사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이다.

정답. ⑤

┏ 사실로서의 역사: 과거 역사의 사실들 그 자체(무수한 과거 사실들의 집합) →객관적 역사

┗ 기록으로서의 역사: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역사가의 주관이 가미) →주관적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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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다음 중 청동기 시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도끼 등의 공구가 출토되었지만 농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② 움집의 구조는 장방에서 둥근 모양으로 변천되었다.

③ 비파형 동검은 만주지방에서만 발견되었다.

④ 웅기 서포항 유적에서 발견된 호신부를 통해 당시 주술 신앙에 대해 알 수 있다.

⑤ 돌곽무덤과 움무덤을 사용하였다.

정답. 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묘제는 청동기때 나온다고 보면 좋다. 이 시기 대표적인 묘제로는 돌무지무덤(적석총), 돌널무덤, 돌곽무덤[돌덧널무덤], 나무널무덤, 독무덤[옹관묘], 움무덤[토광묘] 등이 있었다. 이후 철기시대가 되면서는 독무덤, 널무덤, 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 청동기시기 농구는 당연히 있습니다. 다만 청동제 농기구가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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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다음 보기에 제시된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산릉(山陵)과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 적당하지만 오과(五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노략질 하지 않는다.

(나)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평원과 연못이 없어서 계곡을 따라 살며 골짜기 물을 식수로 마셨다. 좋은 밭이 없어서 힘들여 일구어도 배를 채우기에는 부족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였다.


① (가) - 수렵 사회의 전통으로 제천행사가 12월에 있었다.

② (가) - 서옥제가 있었다.

③ (나) - 특산물로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했다.

④ (나) - 단궁이라 불리는 활,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했다.

⑤ (가), (나) -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다.

정답. ① (가)는 부여(특산물 말·주옥·모피), (나)는 고구려(서옥제)

- 단궁, 과하마, 반어피는 동예의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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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신라의 영토가 확장된 시대 순이 바른 것은?


㉠ 금관가야 ㉡ 한강 유역 ㉢ 우산국


① ㉠ - ㉡ - ㉢ ② ㉠ - ㉢ - ㉡

③ ㉢ - ㉠ - ㉡ ④ ㉢ - ㉡ - ㉠

⑤ ㉡ - ㉠ - ㉢

정답. ③ 신라의 6c는 반드시 기억해두라고 말씀드렸다.

지증왕(우산국) - 금관가야(법흥왕) - 한강유역(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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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보기의 사실을 근거로 추론한 내용 중 옳은 것은?


(ㄱ) 신문왕 7년(687) -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ㄴ) 신문왕 9년(689) -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였다.

(ㄷ) 성덕왕 21년(722) -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ㄹ) 경덕왕 16년(757) -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① 신문왕 때 귀족 세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② (ㄱ), (ㄴ)로 인해 국가 재정이 보다 약화되었다.

③ (ㄷ)의 지급으로 국가의 역역(力役) 파악이 강화되었다.

④ (ㄹ)의 실시로 귀족 세력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⑤ 토지 지배를 둘러 싼 대립이 국가와 농민 간에 있었다.

정답. ③

정전(丁田)이라는 말이 말 그대로 “정(丁)을 기준으로 준 토지”란 뜻에서 ‘정(丁)’의 관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나라의 정전은 백성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토지를 ‘왕토사상’의 관념에 비추어 추인해 준 것으로, 토지제도로 확인은 가능할지언정 얼마만큼 역(役)의 파악까지 가능한지는 사실은 미지수이다. 균전제 관념으로 이해할 경우 이러한 것이 비교적 명확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균전제는 한번도 실시된 적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전세를 역의 문제로 고려할 수 있는 사례이긴 하지만, 그렇게 당연히 일치시킬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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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다음과 같은 정치 형태가 나타난 시기의 상황 설명으로 옳은 것은?


정조가 죽고 순조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조의 유탁으로 김조순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여, 순조를 보필하게 되면서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중앙의 요직은 모두 이들 일족이 독점하였다. 그 뒤 조만영의 딸이 익종의 비가 되어 헌종을 낳자 헌종때는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15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김조순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가 되면서 다시 안종 김씨가 정국을 주도하였다.


① 붕당의 교체가 급격히 진행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②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균역법이 시행 되었다.

③ 비변사가 핵심 정치 기구로 자리 잡았다.

④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북벌 정책을 추진하였다.

⑤ 인사관리를 통해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정답. ③ 19c 세도정치기에 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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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밑줄 친 그가 추진한 정책 중 옳지 않은 것은?


나라에 제도로서 인정(人丁)에 대한 세를 신포(身布)라고 하였는데 충신과 공신의 자손에게는 모두 신포가 면제되었다. 이 법이 시행된 지도 이미 오래 됨에 턱없이 면제된 자가 매우 많았다. 근래에 와서는 무릇 사족이란 자는 모두 신포를 바치지 않고, 그 모자라는 액수를 평민에게 덧붙여 징수하여 보충하고 있었다. 그는 이를 수정하고자 동포(洞布)라는 법을 제정하였다. 가령 한 종리에 2백 호가 있으면 매호에 더부살이 호가 약간씩 있는 것을 정밀하게 밝혀내어 계산하고, 신포를 부과하여 고르게 징수하였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면제되던 자라도 신포를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 박제형, 근세 조선 정감 -


① 정치기구를 재정비하기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부활시켰다.

② 전통적 공동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한 향약을 강화했다.

③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편찬했다.

④ 군정을 바로 잡기 위해 호포제를 실시했다.

⑤ 환곡을 개혁하고 사창제를 실시했다.

정답. ② 흥선대원군 대의 정치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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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고종 때 시행한 군비 증강 사업을 실시한 순서로 바른 것은?


① 해군제 도입 - 원수부 창설 - 무관 학교 창설 - 징병제 실시 발표

② 원수부 창설 - 해군제 도입 - 징병제 실시 발표 - 무관 학교 창설

③ 무관 학교 창설 - 해군제 도입 - 징병제 실시 발표 - 원수부 창설

④ 원수부 창설 - 징병제 실시 발표 - 무관 학교 창설 - 해군제 도입

⑤ 해군제 도입 - 무관 학교 창설 - 원수부 창설 - 징병제 실시 발표

정답. ⑤ - 무관학교 창설(1898.7) → 원수부 창설(1899.6) → 징병제 실시(1903.3)

 ※ 해군제는 도입된 적이 없습니다.

<해군제 도입에 관한 논의 내지는 사례>(역사와 현실19 110, 114)

- 기연해방영 설치(임오군란 이후)

- <육해군 친총에 관한 조칙>(1898.6) 후 <육군증설과 해군정제에 관한 조칙>(1898.7.2)을 내려 해군편제 방법 및 경비 확충에 관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토록 함

- 1903년 7월 군부대신 윤웅렬의 주관 아래 일본 미쓰이물산으로부터 군함 양무호(揚武號)를 구입하는 한편, 1895년에 폐지되었던 해군영과 통제영을 고쳐 해군을 창설하고자 함 → 이게 바로 해군제 창설의 시도이나, 분명하게 실패하였음. 즉 “도입”이란 표현 사용하지 못함.

※ 참고

징병제는 충분히 문제를 낼 수 있습니다. 징병제 도입 결국 실패하지만 조칙을 발표하기는 했었거든요. 그런데 해군제도는 우리나라에 도입된 적이 없습니다. 해군을 만들어가려는 시도는 몇 번 있었지요. 명확히 고종시대에 “해군제 도입”은 없습니다. 이문제 내신분 잘못 내셨어요. 1903년 양무호를 구입하면서 시도를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실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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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던 해의 사건이 아닌 것은?


① 유인석 등이 13도 의군 결성

② 조선총독부 설치

③ 105인 사건

④ 헌병경찰제 실시

⑤ 경학사 및 신흥강습소 설치

정답. ⑤ 서간도 지역을 독립운동근거지로 선정한 후, 이회영·이시영 6형제와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등이 모여 한인들의 자치단체로 1911년 4월[5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어 청년자제들에게 문무쌍전의 민족교육을 시행하기 위하여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했다. <고려한국사 근현대사 p330>

<경학사 취지문>

“경학사의 경은 인명을 보활할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민지를 개발한다는 뜻으로, 경(耕)과 공상(工商)은 비록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는 모두 실업에 속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체력과 덕력을 겸비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자연히 교육의 과조(科條)가 되는 것이다.”

→ 경학사는 병농일치(兵農一致)에 입각한 근로교육을 통하여 구국항일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민단적 성격의 한인자치기관이었다.

- 105인 사건 : 안악사건을 포괄한 사건으로 보는 분도 있고, 안악사건(안명근의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과 구분해 보려는 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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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남북한의 통일 외교 정책 추진과 관련된 내용 중 옳은 것은?


① 1972년에 7·4 남북 공동 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원칙에 합의하였다.

② 1990년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남한은 북방에 대한 외교 정책을 포기했다.

③ 평화통일의 3대 원칙에 따라 남북 간 화해·불가침 협정 등이 채택된 것은 1988년의 7·7선언이다.

④ 1961년 5·16 직후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협상론, 남북 교류론 등 통일 논의가 제기되었다.

⑤ 1982년 북한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은 1민족 2국가 2체제를 목표로 한다.

정답. ①

- 노태우 때 통일정책의 특징은 북방교섭에 있다(1988~1992). 이는 자본의 시장확장요구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협상론, 남북교류론 등 통일논의는 2공화국 때의 사건이다. 

- 북한의 연방제 : 1민족 1국가 2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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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조선시대 사회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졌을 때 지방자치적으로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했고, 환곡제를 실시해 농민을 구제했다.

② 범죄 중 가장 무겁게 취급된 것은 반역죄와 강상죄였다.

③ 의료시설로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생원, 동·서활인서 등이 있었다.

④ 재판에 불만이 있을 때 사건의 내용에 따라 다른 관청이나 상부 관청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⑤ 농본 정책을 실시해 양반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농민의 토지이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정답. ① 지방자치적으로 실시된 것은 사창제이다. 위 지문은 국가의 민구제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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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조선 전기에는 고려 시대의 농업 기술이 개량되면서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다음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밭농사, 조·보리·콩의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다.

② 시비법이 발달해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③ 쟁기·낫·호미 등의 농기구가 개량되었다.

④ 목화의 재배가 확대되어 의생활이 개선되었다.

⑤ 모내기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벼,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정답. ⑤ 이앙법의 전국적 확산은 조선후기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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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다음 중 군사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나.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①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폐지되었다.

② 지방 방어 체계의 강화를 위해 설치되었다.

③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었다.

④ 장기간을 근무하고 일정 급료를 받는 상비군이었다.

⑤ 병농일치를 원칙으로 하는 의무병제에 따라 편성되었다.

정답. ④ 조선후기 최대군영인 훈련도감에 관한 기사이다(조선후기 지속됨). 이 훈련도감을 통해서는 당시의 정치 뿐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많은 현상을 연계해서 설명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아주 재미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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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다음 중 조선 시대 붕당정치의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붕당정치가 출현하였다.

② 중종이 사림세력을 대거 등용해 붕당이 출현하였다.

③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이 정계에 진출해 붕당이 출현하였다.

④ 붕당은 학문의 경향과 상관없이 정치적 이념에 따라 결집하였다.

⑤ 사림 세력이 동인·서인으로 분열돼 붕당이 출현하였다.

정답. ⑤ 붕당은 선조대[명종대] 사림들이 중앙정계를 장악하고 난 뒤 자기분열에 의해 나타난 정치현상이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바라보는 연구틀>

조선후기의 정치사는 좋든 싫든 “붕당정치사”라는 프레임웤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또 그렇게 익숙해져 있어야 하고 모든 현상을 붕당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된다. 물론 이러한 설명방식은 한계가 있는 게 분명하다. 예를 들면 이에 따를 경우 정치를 상당히 간편하게 설명할 수 있기는 하지만 왕을 설명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의 조선후기를 바라보는 정치사적인 프레임 웤은 “붕당정치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연구틀을 제시하는 것은 천재가 나오지 않는 한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비판하면서도 대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최근(1995년경 박사논문) 숙종조를 통해 왕권중심의 정치사를 고찰하려는 시도가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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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다음 중 조선후기의 사회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향촌사회에서는 수령의 권한이 약화되었고, 관권을 밭아보던 향리의 역할도 비례하여 축소되었다.

② 정조 때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되어 능력을 발휘했다.

③ 유교적 명분론이 설득력을 잃어가자 도참 등의 예언 사상이 유행했다.

④ 양반 중에는 토지를 잃고 몰락해 전호가 되거나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⑤ 지배층의 압제에 대한 농민의 저항은 벽서, 괘서의 형태에서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다.

정답. ① 조선후기는 수령권이 강화되어 나가면서 사족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또한편, 수령권이 강해지면서 더불어 향리의 권한도 강해져나갔다. 이는 향리들의 수탈이 증가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지방사회사>

┏ 전기 : 국가[수령] - 향리 - 사족의 3자구도 → 이때는 향리를 제압하는 초점이었기에 수령과 사족이 연합하여 향리를 통제해 나갔다.

⇨ 조선초기 향리를 통제하던 2대법과 유향소·경재소의 주기능을 살펴보라.

┗ 후기 : 이후 사족이 향촌사회를 장악하면서는(향회, 유향소, 향약 통해 장악, 붕당정치와 맞물려 서원을 통해서도 사족세력 결집·확장) 이들을 통제하는 게 국가의 주 목표가 된다. 즉 조선후기는 국가[수령]과 사족의 양자구도가 된다. 이대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이 ‘신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은 당연히 성장배경이 사족과 다른 세력이 되어야한다.


※ 조선후기 사회사·경제사를 바라보는 연구틀이 무엇인지도 꼭 전제를 하고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이역시 위와 같은 취지로 많은 비판을 받고는 있지만 대부분은 그 틀을 벗어날수 없으므로 불가불 여러분들은 이 방법을 공유하셔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개념이 뭔지는 알고(궁극적인 방향이 이것이므로 이 내용이 무엇인지는 당연 알아야 합니다)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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