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의 대외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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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18. 22:13 한국사/1 전근대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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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고려의 대외항쟁 [거 여 몽 왜 광 별 삼 화][서 양 강][7 주 면 성 감 대]

10~

11C

거 란

광군사

1-(강동6), 2-(귀주전투), 3-감찬(귀주대첩)

침입영향: 7대실록편찬, 현공거법, 창수렴법, 국급고법, 천리장성,

축조, 목양마법, 초조장경조판, 거의 세력균형

12C

여 진

별무반

윤관(동북9), 이자겸의 금에 사대로 평화유지

13C

몽 고

삼별초

최충헌(강동의역, 1218 - 조공약속), 박서(귀주전투), 김윤휴(처인부곡민전투)

14C

,

화통도감

홍건적 - 이승경, 이방실격퇴 / 정세운, 이성계격퇴

- 최영 / 이성계 / 최무선(우왕,1377,진포싸움)

 


국경선 변화 추이

1. 통일신라: 기벌포전투후(대동강~원산만)

2. 고려태조: 북진정책(청천강~영흥만)

3. 고려성종: 서희강동6(압록강~도련포)

4. 여말공민: 쌍성총관부회복(압록강~함남)

5. 조선세종: 김종서46(압록강~두만강)

2. 거란족()의 침입: 호족이 정치세력

1) 원인: 태조(만부교사건), 정종(서경천도계획,광군사), 광종(성진을 쌓아 북방경계) 북진정책

2) 침입 * 강동6(용주철주통주귀주곽주흥화진(의주))

- 1(성종.993):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 강동6주 차지(국경선이 압록강까지 확장)

- 2(현종.1010): 강조의 정변을 계기. 개경의 함락 양규가 곽주와 통주에서 선전하였고 하공진의

정전 교섭으로 거란과 화의가 성립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고려에서 철병

- 3(현종.1018): 강감찬의 귀주대첩 승리(거란군의 섬멸)

3) 결과

- 고려, , 거란의 세력균형유지 외교관계의 수립

- 거란과의 강화가 체결되면서 강동 6주가 고려의 영토로 인정

요의 연호를 사용하고 송과 외교 관계 단절을 약속(경제적, 문화적 관계는 지속)

문종 대에 가서 송과의 정치적 관계 회복

- 나성 축조(1029):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 주위에 축조

- 천리장성 축조(1033~1044): 거란과 여진의 방어(압록강 ~ 도련포, 덕종~정종)

- 7대실록 편찬: 현존X

- 초조대장경 조판: 몽고 2차 침입 때 소실

- 사회적 보수주의 성장

 

3. 여진족(. 12C, 한때 말갈이라고 불림): 문벌귀족이 정치세력

1) 여진족의 성장: 12세기 초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우야소(오아속)가 여진족을 통합. 고려와 충돌

2) 별무반 조직(윤관):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승병) [보기] *“척경입비도는 조선후기 제작

3) 별무반으로 여진을 몰아냄(1107): 동북 9성의 축조(예종), 척경입비건립 1년만에 반환

4) 금의 건국(1115): 우야소의 동생 아구다(아골타)가 여진을 통일

* 문벌귀족은 여진족과의 관계에서 보수적 성향을 지님.

* 여진족과는 무력충돌이 있으나 금과는 무력충돌이 없음

* 여진족이 금을 건국한 이후에도 교류는 계속됨.

5) 금의 성장과 고려에 군신관계 요구

- 고려에게 형제 관계를 맺고 화친하자고 제의(1117)

- 송과 요를 멸망시킨 후 고려에 군신관계를 강요(1125)

- 이자겸이 정권유지를 위해 수락, 북진정책의 좌절(보수적)

 

4. 몽고족() : 무신정권 때 싸움

1)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대요수국을 세우고(1216) 두만강 유역에는 동진국이 등장

2) 고려와 원과의 만남

- 몽고족에 쫓겨서 침입한 거란족을 김취려가 제천에서 대파(1217)

- 강동의 역(1219): 몽고에 밀려 쫓겨 내려온 거란족을 고려와 몽고가 연합하여 격퇴. 몽고와의 첫 접촉

3) 원의 침입: 1231~1270 6차에 걸쳐 침입 *1270 개경환도이후 부터 원간섭기 (*원침입기는 무신집권기)

- ·몽 협약(1219): 일방적으로 형제 관계를 체결하고 과도한 공물 강요

- 몽고사신 저고여의 피살(1225): 몽의 침입의 원인

- 1차 침입(1231): 귀주에서 박서가 저항 (귀주전투)

- 2차 침입(1232)

최우는 몽고의 무리한 조공 요구에 반발하며 강화도로 천도(1232), 팔만대장경의 조판(선원사)

김윤후: 처인성(용인)에서 살리타를 사살 (처인 부곡민 전투)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소실

- 3차침입: 최우가 저항, 경주까지 침입, 황룡사 9층탑 소실, 속장경 소실(=교장)

- 5차침입: 김윤후, 다인철소 천민의 활약 (충주성 전투)

- 6차 침입(1254): 1254~1259 4차례에 걸쳐 침공

- 무오정변(1258): 유경, 김준 등이 최의 제거 최씨 정권 종식. 화의 불가피. 개경환도와 태자입조 약속

- 대몽 항쟁

정부의 대응: 백성들을 산성(산성입보)이나 섬(해도입보)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

팔만대장경 조판

몽고군 격퇴 사례: 충주 다인철소(익악현으로 승격), 용인 처인성(김윤후와 처인부곡민의 항전)

초조대장경(2차침입 때)속장경(3), 황룡사 9층 목탑(3)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

- 개경환도: 태자의 입조를 조건으로 몽고와 강화(1260)체결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1270)

- 삼별초의 항쟁(1270~1273, 무신기X): 개경환도에 반대, 강화도 진도(배중손이 죽음) 제주도(김통정의 지휘)

 

5. 왜구, 홍건적: 권문세족 집권기에 침입

원 말기에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러 홍건적이라 불림

1) 홍건적 침입(공민왕)

- 1차 침입(1359): 이승경, 이방실 등이 격퇴, 서경함락

- 2차 침입(1361): 정세운, 안우, 이방실 등이 격퇴, 개경이 함락되어 왕이 안동(복주)까지 피난

2) 왜구 침략

활동범위: 경상도 해안에 출몰 전라도 지역으로 활동 범위 확대 전국, 전지역으로 확대

왜구의 격퇴

외교교섭: 정몽주, 김일 등을 일본에 보냈으나 실패

무력 토벌 전개: 최영,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 [홍진황관대]

- 최영: 홍산싸움 - 최무선:“화통도감설치 진포대첩

- 이성계: 황산대첩 - 정지: 관음포싸움

- 박위: 대마도(쓰시마섬) 토벌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세종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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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14 대외 관계의 전개

1. 경정 전시과가 시행될 시기에는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40만의 대군으로 침입하였지만, 양규의 선전으로

강화를 맺고 물러갔다. (2013년 9급 기상직)

2. 서희는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2013년 9급 기상직)

3. 윤관은 여진의 확대에 대비하여 4군과 6진을 개척하였다. (2013년 9급 기상직)

4. 고려 중기에 고려가 요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여 그들의 침략을 불러왔다. (2007년 국가직 7급)

5. 고려는 요와의 지계(地界) 협상에서 고구려 역사 계승을 주장하였다. (2012년 경찰간부후보)

6.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종은 광군사를 설치하고 송과 국교를 맺어 대비하였다. (2008년 서울세무직 9급)

7. 고려 중기에 송이 금을 견제하기 위하여 고려와 친선 외교를 도모하였다. (2007년 국가직 7급)

8. 고려는 송과는 문화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2009년 국가직 9급)

9.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2009년 국가직 9급)

10. 고려는 송과 요 사이에 세력 균형을 이루어 능동적인 외교를 시도하였다. (2012년 경찰간부후보)

11. 고려는 초기에 강동 6주를 얻어 압록강 유역까지 국경을 넓혔다. (2012년 법원직 9급)

12. 윤관은 17만 대군을 이끌고서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2012년 지방우정청)

13.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하였다. (2010년 경북교행 9급)

14. 몽골의 침입 당시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2012년 법원직 9급) 



주제 14 대외 관계의 전개 OX 정답 및 해설

1. ( X )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발생한 거란의 2차 침입(1009, 현종 1)에 대한 설명이다. 경정전시과는 문종 30년(1076)에 실시되었다. 

2. ( ○ ) 성종 12년(993) 거란 소손녕의 침입(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는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3. ( X ) 4군 6진을 개척한 것은 조선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이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축조(1107~1108

년)하였다. 

4. ( X ) 고려는 우리 민족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서 처음부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게다가 송이 중국을 통일한 후 고려가 송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자 거란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거란은 송을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려가 송과 손잡을 것을 우려하여 고려를

먼저 침략하였다. 

5. ( ◯ ) 거란(요)의 1차 침입에 맞서 서희는 적진으로 들어가 요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

하였음을 설득시켜 압록강 동쪽의 6주를 차지할 수 있었다. 

6. ( X ) 정종(재위 945~949) 때 광군사가 설치된 것은 맞지만 송과 국교를 맺은 것은 광종(재위 949~975) 때이다. 송은 960년에 건국되었다. 

7. ( ◯ ) 고려와 송은 거란(요), 여진(금)의 압력에 맞서 친선 관계를 맺었다. 

8. ( ◯ ) 송이 중국을 통일하고(960) 거란[요]와 대치하자, 고려는 송과 광종 13년(962) 정식으로 국교를 맺고 요를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따

라서 거란은, 송과 친교관계를 맺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는 고려를 경계하였다. 

9. ( ◯ ) 고려는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사를 조직하여 30만 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10. ( ◯ )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11. ( ◯ ) 요의 성종은 소손녕의 80만 대군을 보내 침략하여,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

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2. ( ◯ ) 고려는 윤관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정복하고, 동북 9성을 쌓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진의 침입이 계속되어 9성을 수비하기 어려웠고, 서북에는 거란 세력이 있어 동북의 여진족 토벌에만 국력을 기울일 수 없어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1109).

13. ( ◯ ) 몽골군의 1차 침입 이후 무신 집권자 최우는 1232년 7월 정권 유지와 장기 항전을 위해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이에 몽골군은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와 국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하며 재침입하였다. 

14. ( ◯ )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 주력 부대는 광주를 공격하다가 패배하였고, 처인 부곡(지금의 경기도 용인)에서 승려 김윤후가 지휘하는 농

민군의 화살에 맞아 살리타가 사살되는 등 패배를 거듭하였다. 이후 처인 부곡은 현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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